[다산칼럼] 바람직하지 않은 19단 외우기

박성래 최근 19단 외우기가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언필칭 '수학의 나라', '정보기술(IT) 강국' 인도를 들먹이며, 인도의 오늘이 바로 19단 외우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그럴듯한 주장과 함께 한국의 초, 중등학교 학생들 사이에 이런 바람이 불고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재량학습 시간에 19단 외우기를 시키고, 관련 책, 표, 스티커, 포스터 등등이 날개돋친 듯 팔린다고도 한다. 정말로 우리 아이들에게 '구구단' 보다 훨씬 긴 '19단' 외우기를 시켜야 할까? 수학자들 사이에도 '19단 외우기'에 대한 의견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 듯하다. 대체로는 반대 의견이 더 많은 듯하지만… 그것도 그럴 것이 외우기가 일정부분 교육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외우기를 권장할라치면 이 세상 모든 지식을 암기하게 하는 것은 어떨까? TV에서 진행되는 여러가지 퀴즈프로에는 암기왕들이 등장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신문, 잡지 등등 닥치는 대로 읽고, 자기 기억 속에 그런 단편적 지식을 쌓아두기만 하면 이런 퀴즈프로그램에서는 크게 성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암기(暗記)란 별로 교육적이지 않다고 나는 믿는다. 19단 외우기만해도 그렇다. 그보다는 차라리 주판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암산을 연습시키는 편이 더 유익할지 모르겠다. 그리한다면 어디 19단뿐일까? 99단, 아니 999단까지도 암산으로 번쩍번쩍 계산해낼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지금은 옛말이 되어버렸지만 컴퓨터가 활개치기 전에는 주판이 없지 못할 계산수단이었고, 주판이 널리 사용되던 시절에는 그것을 머리속에 그리며 암산하는 재주가 제법 보급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암산해내는 모습은 그야말로 신기(神技) 그 자체였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지금처럼 19단 외우기가 유행하면 곧 그것을 암기하는 사람에게 유리한 셈 문제가 출제될 것이고, 그러면 이미 암기한 사람이 문제를 더 잘 풀게 될 것이다. 그런 과정속에 19단 외우기는 더욱 인기를 얻게 되고 이런 상승과정 속에서 한동안 19 단 외우기는 퍼져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암기가 대단히 넓은 응용력을 발휘할 이치는 없다. 사람은 살다보면 숫자계산을 그리 많이 할 경우가 없다. 또 진짜로 큰 수의 계산이 필요할 경우는 컴퓨터를 쓰면 그만이지, 19단 정도로는 크게 도움 되지도 않는다. 또 그걸 외운다고 근본적으로 수학을 잘하게 될 것도 아니다. 하물며 19단 외우기가 지능개발에 도움될 까닭은 더욱 없어 보인다. 또 잘 외우지 못하는 학생들의 좌절감은 무슨 부작용으로 남게 될지도 알기 어렵다. 사람은 지적 능력이 다양하면서도 서로 다르기 마련인데 암기를 잘 못한다 하여 다른 재능이 버림받게 되어서야 되겠는가? 19단의 마지막 수는 19×19=361이다. 그것은 가로 세로 각각 19줄을 그려 만든 바둑판의 눈 수로 나타난다. 1년의 날자 수를 맞춰 바둑판은 그렇게 그려졌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1년의 날자수 365를 신비의 숫자로 여겼다. 당연히 360 또는 365를 가지고 여러가지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래서 19는 과학사에서 중요하다면 중요한 숫자가 된다. 하지만 바둑판의 눈 수가, 또는 과학사의 흥미로운 숫자가 바로 인간두뇌와 연결되지는 않는다. 19단 외우기를 두고 나는 오히려 수학이 고대(古代)로 회귀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고대문명에서는 수학이 철저하게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수학자들은 필요한 기초계산을 표로 만들어 그걸 외우거나, 써놓고 보아가며, 필요한 계산을 하기 마련이었다. 편리한 아라비아 숫자와 10진법이 보급되기 전인 12세기세기까지 그랬다. 철저하게 교육받고 훈련받은 전문 수학자가 아니고서는 보통스런 계산조차 해낼 도리가 없었다. 계산이 대중화되기는 12세기 이후 아라비아 숫자와 10진법이 널리 보급되면서 부터의 일이다. 누구나 간단한 계산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니 이제 다시 셈법을 대중으로부터 차단하고 전문가에게 되돌려주려는 것인가? 1천년 전의 세상이 그리도 부럽단 말인가? 이미 한국의 청소년들에게는 외워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19단 외우기까지 얹어서 그들을 더 괴롭힐 필요는 없다고 나는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