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인권과 임금, Y=f(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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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
선(善)하다고 옳은 것은 아니다. 동기가 결과를 정당화할 수도 없다.'원인-결과'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면 어린아이 칼들고 뛰듯 위험한 꼴이 난다. 착한 사람들이 만드는 악한 사회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가 그런 경우다.당초 시장에서 결정될 문제를 '사회적 논의'로 끌고간 것부터가 잘못이지만 여기에 엉뚱한 장애물이 하나 더 붙게 되었으니 뒤죽박죽이 될 것도 뻔하다. 물론 인권위원들이 잠을 설치며 고민했을 법한 임금문제의 인권적 요소는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소수집단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 인권위의 고유한 의무라는 명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세상에 인권과 관련되지 않은 일이란 것부터가 어디 존재하기나 할 법한가. 한때 중앙정보부가 국가안보를 내세워 무소불위의 간섭과 인권 침탈을 자행한 것처럼 지금 인권위가 그 반대의 명분으로 세상 모든 일에 간섭하려 든다면 못할 일이 없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기왕에 인권 이야기가 나왔으니 임금과 인권이 갖는, Y=f(X)의 함수관계부터 다시 공부해보는 것이 어떨는지.
불행하게도 세상에 저임금,저소득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사람답게 사는 것에 물질적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은 긴설명이 필요없다. 나라별로 인권의 순서를 매기면 그것이 바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국가별 순서라는 것도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임금(소득)이 올라가면 인권위가 없더라도 인권 수준은 저절로 높아진다. 사람의 몸값이 싸면서 인권이 보장된 나라도 없다.
문제는 반대 경우다. 인권을 보장한다고 임금이 올라갈까. 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아니, 올라 갈 수가 없다. 바로 그 때문에 개인과 기업,나아가 국가들 또한 저마다 생산성을 높이고 경쟁력을 확보하기에 열을 올린다.
그렇다면 임금과 소득은 어떻게 결정될까. 역시 '불행하게도'라는 수식어를 달고 말할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임금은,최저임금제 등 이타심에 가득찬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각종 보호제도가 아니라 오직 기업과 국가의 생산성이 결정한다. 투쟁의 결과가 아닌 것은 물론이다. 이것이 이 세상이 천국이 아닌 이유다.
얼마전 수조원의 특별 상여금을 지급한 삼성전자는 종업원들의 인권을 생각해서 그처럼 높은 보너스를 지급했을까. 아니라면 혹시 다른 회사의 강성 노조가 삼성의 울타리를 넘어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을까. 물론 둘 다 아니다.그렇다면 삼성전자의 급여체계는 과연 누가 결정할까. 다시 한번 '불행하게도'라는 단어를 앞세워 말할 수밖에 없다.삼성전자의 근로조건과 임금은 착한 사람들의 시혜적 활동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노키아와 인텔,소니와 LG전자 등 '무서운' 경쟁자들에의해 시장에서 결정된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 권고안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인권위와 미국의 인권위가 동일한 일을 하고도 보수가 다른 것은 과연 무엇때문일까. 여기에 답할 수 없다면 인권위원들은 임금문제에 대해 너무도 손쉽게 발언하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한국의 구두닦이와 미국 구두닦이의 소득이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나라마다 국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악을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의 피눈물을 짜내고 있는 엄존하는 차별은 과연 누가 어떻게 고쳐갈 것인가. 물론 방법도 있고 할 일도 있다. 비정규직 처우개선을 위해 정부가 해야할 일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대기업 노조가 구축해놓은 강고한 참호들을 부수어 내고 이권구조를 해체하며 노동시장 내부의 착취 과정을 차단해야힌다.
차별은 바로 그런 곳들에서 나온다.임금은 하나도 둘도 생산성의 결과이며 생산성 향상은 강성노조 용인,인권위의 무분별한 간섭같은 생산성 저해요소들을 없애는 것에서 시작된다. 개인의 어리석음은 동정받을 일이지만 국가의 어리석음은 국민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공무원 숫자를 늘려 실업자를 줄인다는 것이 정부의 생각하는 수준이니 인권위원회인들 다를 것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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