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이건희 회장과 고려대

이건희 삼성 회장은 지난 2일 저녁 그 떠들썩하던 고려대 캠퍼스를 빠져나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지못해 명예박사 학위증을 받아들었지만 눈에 들어온 '글로벌 프라이드(Global Pride)'라는 고려대 개교 1백주년 기념 표어엔 그만 고개가 가로 지어졌을 것이다. 어윤대 고려대 총장은 "굳이 받지 않겠다는 분을 모셔다 봉변을 당하게 했다"며 답답해 했다. 하지만 답답한게 어디 총장 뿐이랴.고려대 대다수 학생들과 23만명에 이르는 동문들은 낯이 뜨거워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됐다고 한숨이다. 학교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의 동상을 철거해야 과거사가 청산된다던 학생들이 이젠 '세계 초일류 경영인'의 학위수여식마저 엉망진창을 만들어 놓았으니 말이다. 소식을 접한 시민들도 갈수록 극렬해지는 대학생들의 행태에 기가 막힐 뿐이다. 이건희 회장은 누가 뭐래도 세계 초일류 경영자다. 이 회장이 이끄는 삼성은 이미 세계 초일류 반열에 올랐고 세계 주요 경영대학원이 가장 중요히 여기는 케이스 스터디 대상이다. 내로라는 글로벌 기업도 삼성을 벤치마킹하지 못해 안달이고 정부 각 부처도 앞다퉈 삼성을 배우자고 법석을 떨지 않던가. 구태여 고려대가 아니더라도 이 회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겠다는 국내외 대학은 줄을 서 있다. 그런 인물을 초대해 학위를 수여하는 자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은 학생들이 과연 '글로벌 프라이드'라는 의미를 알기나 하는 것인지. 백번 양보해 학생들이 뜻이 옳았다 하자.그래도 이런 의사표현 방법은 틀렸어도 너무 틀렸다. 학생답게 지성적으로 자신들의 뜻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지 않는가.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해외에도 적지 않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저 학위수여식장 앞에서 피키팅으로 자신들의 뜻을 밝힐 뿐이다. 지난해 여름 함부르크대학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려다 계획을 취소한 적이 있다. 일부 교수와 학생들이 체첸 사태 등을 이유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런 지적이 일자 푸틴 대통령은 "일정이 촉박해 학위를 받지 못할 것 같다"고 학교에 통보했고 대학은 "준비가 제대로 안돼 수여식을 갖지 못하게 됐다"고 발표했다. 얼마나 부드럽고 서로에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인가.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고려대 총학생회 홈페이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이다. 제 발이 저린 학생들이야 이 회장에 대한 학위 수여를 반대하는 이유를 앞뒤 잴 것 없이 늘어놓는다고 하지만 이들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논리도 한심할 따름이다. 4백억원을 들여 1백주년 기념관 건물을 지어준 사람에게 '종이쪽지(학위증)' 하나 주는게 그렇게 못마땅하냐는 주장에,삼성에 입사하지 못하면 총학생회가 책임지라는 하소연만 줄을 잇고 있으니 말이다. 누구 하나 이 회장에겐 명예박사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논지를 풀어내는 학생은 없다. 일부 학생들이라지만 국내 최고의 사학이라는 고려대의 학생 수준이 이 정도라면 우리는 누구에게 미래를 걸어야 하는지.더욱이 이번 사태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단체는 "자본주의는 폐지돼야 한다"는 강령을 내세우고 있다하질 않는가. 이 회장은 학위수여식에 앞서 배포한 연설문에 이런 내용을 담았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세기말의 혼란을 마감하고 삶의 질과 문화가 한 단계 도약하는 희망찬 신문명의 시대를 기대하였습니다.그러나 전환기의 불안과 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변화의 진폭은 더 커지고 빨라지고 있습니다.이러한 시대를 읽어내는 자는 발전할 것이나 그 물결에 휩쓸리는 자에게는 퇴보가 있을 뿐입니다." 김정호 산업부장 j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