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분식회계 대출 은행도 책임"

한 기업이 고의로 분식회계를 저질러 형사상 유죄가 입증됐다 하더라도 그 기업에 대출해주고 거액을 떼인 은행도 부실 대출에 대한 책임이 일부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이는 통상 불법행위를 저질러 형사상 유죄가 확정된 사람이 피해자에게 부주의 책임을 묻는 경우 피해자 과실을 인정하지 않는 대법원의 판례와 다소 차이가 나는 것이다. 법조계에선 해당 재판부가 금융회사를 영리기업이 아닌 신용질서 유지와 자금중개 기능을 담당하는 공공기관으로 판단,예외적으로 분식회계 피해자에게도 과실책임을 부과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1부(이홍철 부장판사)는 26일 미도파의 허위 재무제표를 믿고 수십억원씩 빌려준 뒤 돌려받지 못한 S보험과 J은행 등 금융회사 5곳이 전 미도파그룹 회장 박영일씨 등 분식회계 책임자 5명을 상대로 낸 100여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 책임을 70%만 인정,"피고들은 원고들에게 모두 70억여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같은 재판부는 또 분식회계 사실을 모르고 진로그룹에 지급보증 등으로 778억원을 빌려주고 이를 회수하지 못한 H은행이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을 상대로 낸 동일한 소송에서도 "대출 심사를 잘못한 은행 책임 20%를 뺀 80%만 피고 책임으로 본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들이 모두 고의로 회계장부를 조작하고 일부 피고들은 유죄 판결까지 받았다고 하지만 원고들도 해당 기업들의 재무상태를 간과하는 등 과실이 있으므로 20∼30%의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원고측 책임을 인정한 것은 금융회사의 공공적 역할에 주목해 은행의 도덕적 해이를 막으려는 것이므로 불법행위 피해자에게 '부주의'에 대한 과실상계를 묻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례의 취지와 어긋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