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미국서 숨쉬고 있는 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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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래
얼마전 미국 동부로 단체관광여행을 다녀왔다.
뉴욕의 한국인 관광회사가 이끄는 5박6일짜리다.
하루는 뉴욕주의 주도(州都) 올바니에서 안내자(가이드)가 그곳 주정부 청사 건물이 멋지다며 사진을 찍게 해주었다.
그날 저녁 그 도시 안내서를 뒤지다가 나는 바로 그 건물 옆 어딘가에 뉴욕주의 한국전쟁 참전 기념물이 있음을 알게 됐다.
다음날 새벽 호텔을 떠나 보스톤으로 갈 때였다.
그 기념물에 대해 묻자 그런 것이 있는 줄 몰랐다는 대답이었다.
40세도 안 되는 그가 '6ㆍ25'나 '한국전쟁'에 대해 잘 알리는 없다.
하지만 이미 방문한 뉴욕주 청사 바로 옆에 있는 한국전 기념물이라면,응당 한국인 관광객들에게는 소개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워싱턴 시내에서는 야외에 잘 만들어 둔 한국전 참전용사 19명의 동상을 구경시켜 주었다.
반들거리는 대리석 벽에 비치면서 그것은 38명이 되고,그것은 곧 38선을 뜻한다는 설명이 어딘가 적혀 있었다.
어려서 그 전쟁을 경험한 나로서는 가슴 뭉클한 대목이었다.
그렇게 진행되는 여정에 조금 옆 길 세일럼(Salem)시의 한 박물관을 보태자면 그것은 사치스런 주문에 지나지 않을 듯했다.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이 작은 도시의 박물관(피바디 에섹스)에는 한국관이 있고,거기에 120년 전 조선의 선비가 보내준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여기는 에드워드 모스(1838~1925)의 고향이고,이 박물관이 바로 그가 활동했던 곳이며,이 유물은 바로 그가 조선의 윤웅렬에게서 얻어 보관하게 된 것들이다.
임오군란(1882년) 때 일본에 가있던 무관 윤웅렬(尹雄烈)과 그 아들 윤치호(尹致昊)는 당시 도쿄대학 생물학 교수였던 모스의 강연도 구경했고,그의 부탁으로 조선의 담뱃대,먹통,관대와 부채 등을 선물했다.
그것이 바탕이 돼 여기 한국관은 만들어졌다.
지금은 2500점의 한국 유물을 갖고 있다고 한다.
여러 해 전 국립박물관은 이 유물을 빌려다가 특별전 '유길준과 개화의 꿈'을 열기도 했다.
유길준(兪吉濬)이 여기 등장하는 것은 1883년의 보빙사(報聘使)와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사절단 보빙사에는 민비의 조카 민영익(閔泳翊)과 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이 선발됐고 5명의 수행원이 따랐다.
바로 그 수행원의 한 사람 유길준은 그대로 미국에 머물러 역사상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됐다.
바로 모스의 덕택이고,처음 그의 집에서 유숙했다.
그 보빙사의 미국 여행을 안내했던 미국 청년 퍼시발 로웰(1855~1913)도 있다.
모스의 강연을 듣고 감격해 일본에 왔다가 갑자기 조선인들의 안내 역할을 맡게 된 그는 뒤에 '조선,조용한 아침의 나라'(1886년)라는 책을 냈다.
그 후 그는 애리조나주의 플랙스태프에 '로웰천문대'(Lowell Observatory)를 만들고 연구에 열중했다.
20세기 초 화성인의 존재를 예측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 유명해진 인물이다.
이 도시 플랙스태프의 '화성의 언덕'(Mars Hill)에 자리잡은 이 천문대는 내가 한국과학사를 공부하면서 지난 30년 동안 언젠가는 한번 꼭 찾아보고 싶었던 곳이다.
이 도시는 미국의 대표적 관광지 그랜드캐니언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관광을 와있었지만,아무도 그 길목의 '로웰천문대'를 찾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한국전 참전 기념물,모스의 박물관,로웰천문대 등은 모두 한국인의 미국 관광에 중요한 요소가 될 법하다.
정말로 많은 한국인이 해외여행을 다니지만,아직 중국 이외에는 우리 역사와 관련된 장소를 찾아 나설 만큼 여유가 없는 듯하다.
이런 관광이 가능하도록 연구를 지원하고,관광 프로그램을 개발해 '역사의식'을 길러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