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골목길에서 길을 잃다

정규재 꽃사슴길! 사랑길! 진실길! 은솔길! 해바라기길! 함박길! 꽃나래길! 장미길!…. 지난 9년여 동안 새주소 체계 구축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길이름 붙이기 사업의 결과로 새로 생겨난 서울의 골목길 이름들이다. 읍.면.동 이름과 지번이 결합돼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지금까지의 일제식 주소체계를 선진국형 주소체계로 바꾼다는 명분을 내세운 그럴싸한 사업. 96년에 시작해 1558억원이 이미 투입됐고 진척률 42%에 234개 기초자치단체들이 참가했다. 그러나 이 새 주소들을 아름답고 좋은 우리말 이름의 새 골목길이라고 할 것인가. 위의 꽃사슴길 운운하는 사례들은 서울에서도 가로 구획이 잘 돼있는 강남구 논현동 학동 일대의 골목길 이름들이지만 실제 이 거리에 가서 이 이름을 들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골목과 집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개나리길 다음에 진달래길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에 계절의 순서를 따라 목련길이 오는 것도 아니며 매화길을 따라 난초길이나 국화길이나 대나무길이 차례로 나오는 것도 아니라면 그 혼동스러운 제멋대로의 길 이름을 들고 모르는 집을 찾아가는 것은 당초부터 수수께끼일 뿐이다. 한별길 갈대길 진실길이 어떤 논리적 순서로 이어지고 꽃나래길 함박길 수정길이 도대체 어떤 질서로 맞닿아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이 구역질나는 혼란스러움은 주소를 들고 실제로 길을 찾아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낮 뙤약볕에 서서 사랑길 다음에 과연 또 어떤 징그러운 미지의 이름이 등장할지 점차 짜증이 더해간 끝에 기어이 길이름 붙인 자들에 대해 일종의 폭발하는 분노 같은 감정을 갖게 되며 급기야는 욕지거리를 내뱉게 된다. "이 멍청이 밥통들아…!" 주소가 무엇인지, 길 이름이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려 없이 그저 그럴싸하고 예쁜 이름만 가져다 붙인다고 골목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순진한 몽상가와 착한 이상론자들은 과연 세상을 얼마나 더 열받게 만들 것인가. 애들이 장난으로 던진 돌멩이가 개구리를 잡는다고,그저 착하고 아름답고 예쁘기만 한 그런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만드는 혼란스럽고 불편하고 쓸모없는…,그래서 기어이 세상을 뒤죽박죽으로 몰고가는 그런 일들이 비단 골목길 이름 붙이는데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사랑길'이니 '장미길'이니 하는 따위의 이름을 떡하니 붙여놓고 우리가 참 예쁜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알량한 문화주의 인물들의 전매특허가 아니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내적 질서와 전후의 순서, 논리적 정합성 따위는 상관없이 그럴싸하기만 하면 아무것이나 가져다 붙이는 것은 행정수도나 공공기관 이전,그리고 전국토를 투기판으로 만들어 놓는 온갖 종류의 아름다운 개발 공약들도 다를 바 없다. 혁신도시와 특화지역과 기업도시와 행정도시,클러스터와 경제 특구들의 아름다운 이름들이 어떤 순서로 갈라지며 맞닿아 있는지 알지 못하는 '도시들의 혼동'은 한낮의 골목길에서 길을 찾는 사람이 갖는 당혹감 외에 더 어떤 혼란과 참담한 기분을 국민들에게 안길 것인가. 더구나 이것을 어디 골목길 찾는 정도에 비길 것인가. 폐해는 심각하고 후유증은 더욱 깊어 이대로 가다간 골목길이 아니라 전국토와 나라꼴이 온통 뒤죽박죽될 지경이다. 공공기관 지방이전과 균형발전의 교차로에서 공공 혁신과 공기업 개혁의 주소지를 과연 찾을 수 있을 것인지, 전국을 지역 특화와 클러스터로 명명해놓은 상황에서 과연 선택과 집중이라는 주소지는 찾을 수 있을 것인지, 종래는 뙤약볕 아래 길을 잃고 분통을 터뜨리게 될 참이다. 가뜩이나 짜증나는 이 후텁지근한 여름날에….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