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그림 없는 세상

황주리 말로만 듣던 별 여섯 개짜리 'W호텔'을 구경하러 갔다. 소문처럼 그 호텔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세련되고 우주적인 최첨단 감각의 인테리어로 보는 이의 넋을 빼앗았다. 창밖으로는 온통 넘실대는 강물이요,호텔 안으로 눈을 돌리면 낯선 별에 착륙한 듯한 아주 참신한 기분이 된다.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의자들은 주머니에 돈이 좀 없는 손님에게도 위압감을 주지 않고 그냥 편히 앉아 쉬어가라고 속삭인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면 어떤 곳에도 판에 박힌 구태의연한 의자들은 보이지 않고 모든 곳들이 앉아도 되는 기능성 의자들이다. 나는 문득 여행을 온 것 같은 자유로운 기분을 느꼈다. 돈 없는 사람들은 점점 더 경제난에 허덕인다는데,세상의 좋은 것들은 점점 더 좋게만 변해가는 세상 이치에 잠시 어리둥절해진다. 하지만 이렇게 기분좋은 호텔이 생겼다는 것 또한 이 재미없는 세상에서의 작은 위안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 호텔의 분위기는 우선 컨셉트 자체가 젊다. 마흔 살 아니 쉰 살 이상의 보통 사람이라면 그리 편안함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도대체 앉을 데가 없다고 투덜댈지도 모른다. 다른 호텔과 달리 벽에는 편안한 그림 한 점도 걸려있지 않다. 호텔 어느 구석에도 종래의 그림이나 조각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작은 소도구 하나하나가 다 치밀하게 계획된 예술 작품의 이미지로 꾸며져 있다. 이쯤에서 나는 직업의식을 되살려 걱정거리 하나가 생겼다. 미래에 생겨날 고급 공간들이 모두 그림을 걸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긴 잘사는 친구들의 최고급 아파트 공간을 구경가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공간의 벽은 점점 더 넓은 창문으로 대치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강이나 산이 보이는 조망권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바깥 세상을 향해 눈과 마음을 돌리는지도 모른다. 비엔나의 유명한 화가이자 건축가인 훈델 밧셀(Hundert Wasser)은 "모름지기 집이란 창이 작아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바깥 세상을 많이 내다볼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창이 작고 온통 안과 밖의 벽들이 그림으로 그려진 훈델 밧셀의 건축물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개성있는 공간 중의 하나이다. 천정부지로 가격이 치솟는 새로 생긴 고급 아파트 공간에서 내가 본 것은 온통 강물이 넘실대는 커다란 창문들과,그나마 몇 개 없는 벽에 걸린 캔버스형 텔레비전 화면이었다. 누구나 어릴 적 종이 위에 그렸던 낙서의 기억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어느 소설에선가 그림이란 이 세상에서 전쟁을 일어나지 않게 하는 데 그 존재의의가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어린 아이의 생각 속에서나 나올 듯한 그림에 관한 이런 정의를 나는 사랑한다. 텔레비전에서 본 젊은 이라크 여성 자살특공대원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전쟁은 사람들의 유년과 젊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그 누구의 잘못이랄 수도 없는 전쟁의 상처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곳곳에 깊이 새겨지고,그 상처들은 또한 우리의 상처와도 절대 무관하지 않다. 어린 아들의 반짝이는 동심으로 가득찬 그림 하나라도 벽에 걸려 있는 그런 집을 나는 좋아한다. 그림이 몽땅 사라진 세상을 상상해본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 대신 알약 하나로 식사를 대신할지도 모른다는 우리 어릴 적의 공상이 빗나갔듯이 우리들의 그리운 그림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희망한다. 그림 한 점이 당신의 벽에서 당신과 함께 늙어가는 정겨운 풍경,내게 그림은 그런 사랑이고 그런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