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시대 정신, 선글라스를 끼다

정규재 강남에서도 집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모 아파트 주변 상가에서 요즘 장사가 가장 잘되는 곳은 '묵은지 고등어 조림' 식당이다. 골목길까지 파고든 '묵은 김치' 열풍 현상의 하나일까? 아니다. 이 아파트에선 사실 묵은지 찌개 같은 냄새 나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없다. 아파트 관리 규정 때문이냐고? 아니다. 이 아파트에선 보통의 음식 냄새조차 잘 빠지지 않아 아예 묵은지 찌개 같은 음식은 포기한 지 오래다. 삼겹살이든 갈비든 집안에서 무엇을 구워먹는 것도 같은 이유로 금기다. 도저히 연기가 빠지지 않는다. 창문을 폐쇄형으로 만든 대신 집안의 환기 시스템을 자연 통풍의 몇 배 이상으로 잘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 설명서가 강조하는 첨단 환기시스템이지만 실제 살아본 사람들은 기겁을 한다. 또 다른 강남의 한 아파트는 집안에서도 짙은 선글라스를 껴야 생활할 수 있다. 외관을 아름답게 한다며 처마도 없이 통유리로 만들어 놓은 창문으로 한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무방비로 쏟아져 들어온다. 도저히 맨눈으로는 생활하기 어렵다. "빌어먹을….집안에서 자외선 차단제라도 발라야 하나!"라고 푸념해 보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발라야지! 물론 에어컨을 풀가동하느라 엄청난 냉방비도 쏟아부어야 한다. 겨울은 어떠냐고? 물론 겨울이라고 곱게 넘어갈 리 없다. 거실에서조차 두꺼운 코트를 껴입어야 한다. 생고생이 말이 아니다. 그러나 너무도 고마운 것은 이런 불편을 감수하면서 2,3년을 참아낸 결과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냉난방비 모두 커버하고 묵은지 찌개 정도는 얼마든지 외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물론 저간의 사연은 절대로 대외비다." 이 지역의 다른 아파트는 지하 주차장이 참으로 고약하다. 요새는 조금 나아졌다지만 한동안 아침 출근길에 20분은 족히 결려야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래도 행여 집값에 영향을 줄까봐 이런 불만도 다른 사람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다. 이렇게 한 2,3년 지난 결과 모든 보상이 따라왔다! 강남의 또 다른 아파트는 단지 안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좀도둑 사건도 절대 외부로 발설하지 못하도록 부녀회의 단속이 대단하다. 한때 이 낡은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내 성폭행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는 풍문이 나돌았지만 이런 사건일수록 확인 불가능이다. 아름답지 못한 사건사고는 파출소에 신고되는 일도 없다. 이유는 우리가 미루어 짐작하는 그대로다. 집값을 위한 길고긴 인내와 투쟁의 나날들이다. 강남만이 그런 것도 아니다. 전국의 부녀회란 부녀회는 정도 차이가 있을 뿐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리 품을 팔면서 투기대열에 동참하든지 아니면 있는 집값이라도 지키고 올려내든지 둘 중의 하나는 해야 이 시대의 주민이요 부인들이다. 부인들만 그렇다고?! 물론 그럴 리가 없다.오늘도 이 시대의 비겁한 사내들은 청문회가 됐건 비리사건에 연루됐건 가리지 않고 모든 투기 책임을 아내에게 떠넘기며 교묘히 빠져나가고 있다. 그것이 이 시대 남자들의 비상시 행동요령이다. 이렇게 투기야말로 가장 명징한 시대 정신이 되고 말았다. 중산층의 품위도, 배운 사람의 위신 따위도 사라진 지 오래다. 모두가 투기적 동기의 천박한 자식이요 노예로 전락했을 뿐이다. 권력과 정부야말로 원조 중의 원조다. 땅 공약으로 유권자를 매수하는 것으로 따지면 악성도 이만저만한 악성이 아니다. 거짓말이 더 큰 거짓말을 부르는 것처럼 개발 공약도 갈수록 커지고 광역화한다. 이렇게 국토는 투기의 제단에 바쳐졌다. 그것은 암세포처럼 한번 뿌리를 내리고 나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스스로를 발전시켜간다. 과연 누가 언제쯤 그것을 끊어낼 것인가.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