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유리구두의 비밀 ‥ 김영순 <크레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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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순
2000년 5월 회사 창립 후 처음으로 단합대회를 연 날이었다.
"들어올 때 두 발로 왔지만 나갈 때는 네 발로 기어나갈 정도로 마실 겁니다. 설마하는 생각은 접으십시오.우리는 사업 안 된다고 다른 부서로 발령나는 대기업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대기업 직원이 아닙니다. 이 회사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받아줄 곳은 없습니다. 낭떠러지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는 대기업 출신이 대부분인 우리 직원들에게 배수지진(背水之陳)의 정신을 일깨울 강력한 자극이 필요했다.
강한 개성을 묶어줄 조직문화도 없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성공할 자신 있습니까." "예" "그럼 기념으로 모두에게 술잔을 돌리겠습니다. 여성분 중 누가 구두 좀 빌려주세요."
우리는 한 여직원의 구두에 소주 한 병씩을 따라 돌려 마셨다.
구두잔이 여러 번 돌고 나서야 겨우 자리를 일어섰던 기억이 아련하다.
훗날 일본 전자업체 산요 사장과의 술자리에서 이 얘기를 했을 때 그는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개인 문화에 익숙한 그들로서는 우리의 술문화가 놀라운 일이었을 게다.
그는 일본으로 돌아간 후 회식 잔으로 쓰라며 일본의 3개 도시를 돌며 어렵게 구했다는 유리구두잔 세 개를 보내왔다.
편지에는 우리의 조직문화에 감동을 받았다며 위생에도 신경 쓰라는 농담이 덧붙여져 있었다.
이 중 한 개는 얼마 후 산요 사장과의 재회에서 돌려줬다.
산요에서도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보라고….이후 유리 구두잔은 체육대회나 창립기념일 같은 행사 때마다 등장하고 있다.
우리 직원 모두는 이 유리구두잔에 술을 나눠 마신다.
술문화도 많이 변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구두잔은 그다지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 신입생의 술 신고식 폐해가 해마다 뉴스거리가 되고,검찰총장이 소위 '검찰주'라 불리는 폭탄주 문화를 없애겠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술은 분명 사람을 흐트러지게 만들면서 인간적인 면을 느끼게 하고 친밀감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업무가 많고 조직이 커질수록 전 직원이 모여 회식하는 일이 줄어들고 있다.
이제 전 직원이 술 먹는 날은 일년에 두어 번 정도다.
나도 이때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도 내 사무실 책장 한켠에는 유리구두잔이 올 가을 만나게 될 신데렐라를 기다리고 있다.
영문을 몰랐을 수도 있는,어느덧 전통이 되어 버린 유리구두잔은 이제 우리 직원 모두의 초심을 잊지 않게 해주는 보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