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속으로] 하이트맥주, 진로 인수 스토리

진로 인수전의 긴장감,최후의 승자 하이트맥주의 비장했던 각오,주류 업계의 새로운 경쟁 구도 등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예다. 하이트맥주의 진로 인수는 국내 주류 업계는 물론 산업계 전반에서도 '일대 사건'으로 꼽힌다. 진로 입찰에 참가한 10개 기업 중 외형이 가장 작은 하이트맥주가 진로를 가져가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하이트맥주의 어떤 힘이 롯데 두산 CJ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을 제치고 진로를 품에 안을 수 있게 했을까.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입찰 서류를 열어본 법원 판사들도 '악'소리를 내게 한 3조4100억원의 응찰가를 내질렀을까. ◆다시 2등이 되는 것은 곧 죽음이다 하이트맥주가 진로 인수 작업에 착수한 것은 진로의 법정관리 개시 직후인 지난 2003년 10월께."회사의 사활을 걸고 진로를 반드시 인수하라"는 박문덕 회장의 특명이 있고부터다. 그후 1년6개월 동안 하이트맥주는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며 치밀하게 인수작업을 진행해 왔다. 2004년 1월 재무·회계,자금조달 컨설팅을 위해 UBS증권 및 산업은행을 파트너로 삼고,6월께 법무법인 지평을 자문 로펌사로 지정하면서 인수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하이트맥주가 일찌감치 진로 인수에 뛰어든 것은 남다른 절박감때문이다. 진로를 다른 회사에 뺏길 경우 하이트의 맥주 사업이 존망의 기로에 설 수 있다는 위기감이 크게 작용했다. 두산이 진로를 인수할 경우 맥주 사업에 다시 나설 가능성이 있고 오비맥주의 최대 주주인 인베브 역시 진로 최대 담보권자인 대한전선과 손을 잡고 있었다. 롯데 CJ 등도 각각 아사히 기린맥주 등 일본 맥주사와 컨소시엄을 이루고 있었다. 박 회장이 '사활을 걸고'라는 표현을 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재호 마케팅 상무는 "경쟁사인 오비맥주의 최대 주주 인베브는 세계적으로 200개 맥주 브랜드를 가진 세계 최대의 맥주 생산업체"라며 "그들이 "큰 맘 먹고 돈을 퍼부어 대면 어떻게 될까"하는 생각을 하면 잠도 안왔다"고 말했다. ◆롯데 못지 않은 '크렘린' 하이트맥주는 내부적으로 이번 M&A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주 요인으로 보안 유지와 정보전에서의 우세를 들고 있다. 인수전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언론은 롯데 CJ 두산의 3파전을 예상했지 하이트맥주를 주목한 곳은 거의 없었다. 군인공제회 교원공제회 산업은행 새마을금고 등 대형 토종 자본만으로 지난해 컨소시엄 멤버를 확정지었지만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후 하이트맥주측이 이를 공개하기 전 멤버가 노출된 적도 거의 없었다. 하이트맥주 고위 관계자는 "솔직히 말해 언론 보도에서 우리가 배제되고 있는 상황을 마음 속으로 즐기고 있었다"고 말했다. 주류업계 관계자들은 하이트맥주가 보안유지에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이 회사 직원들의 각별한 '로열티(충성심)'에서 찾고 있다. 이는 40년간 2등의 설움을 딛고 '하이트 신화'를 이끌어낸 박 회장의 카리스마와도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한 주류도매상은 "하이트의 간부들 중 '박 회장과 회사에 큰 은혜를 입었으니 회사가 죽으라면 죽을 각오가 돼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적잖이 볼 수 있다"고 전했다. 경쟁사인 오비맥주의 한 팀장도 "하이트 사람들이 머리가 좋은지는 모르겠으나 일을 무지무지하게 열심히 하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보안유지와 함께 UBS 산업은행 등 자문사들의 국내외 네트워크를 통해 '적'들의 동향을 리얼타임으로 파악해 나가는 데도 주력했다. 하이트맥주측은 입찰 이틀 전 인베브가 대한전선 컨소시엄에서 이탈하자 두산이 진로를 인수할 것으로 보고,두산 컨소시엄에 합류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했다고 한다. ◆'최대'에서 10%를 더 쓰자 진로 인수전의 백미는 하이트맥주의 응찰 전략.그 핵심은 2∼3곳의 복수 우선협상자가 선정돼 이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결선투표'를 하는 과정을 원천적으로 막겠다는 것이다. 인수 실무 총괄을 맡은 김지현 부사장은 "대기업 그룹들과 같이 우선협상자가 될 때는 우리에 상당히 불리한 것으로 판단했다"며 "이 같은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법원이 봤을 때 '엑설런트한'가격을 쓰는 것이고,채권 총액에 10%를 더 쓰면 될 것 같다고 회장께 보고했다"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이를 토대로 진로 채권단이 회수할 총액을 3조500억∼3조1000억원으로 판단,여기에 10%정도를 얹은 3조4000억원에 '+α'격으로 100억원을 보태 3조4100억원을 써냈다는 것이다. 김 부사장은 "응찰금액 중 채권총액인 3조500억원을 넘는 돈은 진로에 다시 유입된다는 데 우리는 주목했지만 다른 응찰 업체들은 이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윤성민 기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