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금단의 열매' 따먹은 정치권력

박 효 종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어렵고 기업들도 투자의욕을 잃는 등 국정현안들이 산적한데 국정을 책임진 사람들의 태도는 어떤가. 대통령이 "경제ㆍ외교를 잘할 것이라고 내게 표를 줬겠나"라고 반문하는가 하면 경제부총리도 투자부진과 제조업 공동화(空洞化) 현상을 기업의 탓으로 돌리는 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면피성 발언은 될 수 있겠지만 권력자 스스로를 벌거벗게 만드는 발언임을 왜 모르는가.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나라를 강타하고 있는 '쓰나미'라면 연일 톱뉴스로 다뤄지고 있는 안기부 도청 X파일 문건일 것이다. 도청문건이 방송에 의해 공개되자 참여연대를 비롯한 일부 시민단체들은 고질적인 한국형 비리를 뿌리뽑겠다면서 삼성과 중앙일보의 홍석현 사장을 정경유착의 주범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의아스러운 것은 정치권력의 불법도청을 고발하는 내용은 빠져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이 우연은 아니다. 그동안 이번 사태의 본질은 '정경유착'이라고 목청을 높여왔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엊그제 검찰은 미림 팀장이던 공운영씨의 집을 수색해 무려 274개나 되는 도청테이프를 찾아냈다. 발견된 도청테이프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치권력이 무차별적으로 유력인사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도ㆍ감청했다는 사실보다 더 심각하고 중차대한 사안은 없다. 그럼에도 도청이 이번 사태의 본질이 아니라고 강변한다면, 시민단체들은 이른바 '독수독과(毒樹毒果)'의 준칙도 모르는 것일까. 즉 독이 있는 나무의 열매는 역시 독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도청테이프들의 핵심은 정치권력이 탐해서는 안되는 '금단(禁斷)의 열매'를 따먹었다는 사실에 있다. '금단의 열매'는 일찍이 아담과 이브 시대부터 존재했다. 아담과 이브는 지상낙원의 모든 것을 먹고 향유할 수 있었지만, 한 나무의 열매만은 따먹을 수 없다는 엄명을 신으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열매를 따먹었고 그에 대한 비싼 대가를 치른다.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말이다. 도청을 한 정치권력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대통령이 되고 정권을 잡으면 갑자기 우쭐해져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지나 보다. 법에도 없는 '소통령'이나 가신그룹도 만들고 전리품 나누듯 '코드인사'나 '낙하산인사'를 서슴지 않는다. 수시로 '깜짝 아젠다'도 만들고 '정치적 생쇼'도 하면서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도청을 근거로 정권비판자들을 샅샅이 가려내 징벌을 내린다. 그 부끄러운 일들을 하면서도 말로는 항상 '국리민복'이다. 무한권력의 유혹이야말로 정부가 '빅브라더'가 되는 이유가 아닐까. 하지만 권력의 불법 도ㆍ감청이야말로 수영장이나 화장실에서 여성을 몰래카메라로 찍은 파렴치범의 행위와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이 역겹다"고 말하는 그 위선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민주권력에도 따먹어서는 안되는 '금단의 열매'가 있는 법이다. 그 열매를 따먹게 되면 '살아있는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벌거벗은 임금님'이 된다. 지금 나신이 드러나는 정권의 모습들을 보면서 '정부의 실패' 정도가 아니라 '정부의 부도덕성'에 놀라게 된다. 국민의 돈으로 사찰과 도청을 하고 그것을 기밀문건으로 분류해 상부에 보고하는 것은 타락한 권력의 일그러진 모습일 뿐이다.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치마를 들추는 것은 악동의 짓궂은 행위겠지만, 정부가 개인들의 사생활을 들추는 것은 중대한 권력형 비리가 아니겠는가.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여! 무한권력의 유혹에 빠져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벌거벗은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절제하여 '품위있는 왕'이 될 것인가. 선택은 그대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