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설의 '경영 업그레이드'] 사양산업과 블루오션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지방의 메리야스 공장 취재를 마치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곳 공장장은 한숨부터 쉬었다. "이제 한국 팬티 산업은 망했어요. 희망이 없어요." "그 좋은 품질이 문제예요. 팬티를 너무 오래 입을 수 있게 된 거지요. 남성용 팬티의 중국 수출가격이 한 장에 300원인데 이걸 보통 3년은 입을 수 있어요. 그러니 1년에 100원꼴인데 뭐가 남겠습니까?" 공급과잉이야 원래 무서운 것이지만 기업으로서는 좋은 품질도 문제였던 것이다. 산업이 성장해 성숙,사양화되는 길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그 공장장도,기자도 그때 못 본 것이 있었다. 바로 소비자들의 새로운 욕구였다. 그 다음해부터인가 '보디가드' '트라이' '빅맨' 등의 패션 팬티가 히트를 치기 시작했다. 물론 명품업체들이 내놓는 것은 수만원대에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공급과잉 속에서도,사양산업 안에서도 '대박'의 꽃은 핀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가치를 찾아내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기업들이 그 가치를 찾아내지 못하고 사업에 희망이 없다며 좌절하는 것일 뿐이다. 아무리 외견상 공급과잉이라 해도 시장에서 만족하지 못한 소비자들의 수요가 있는 한 기회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김위찬,르네 마보안 교수가 자신들의 20년 연구를 집대성한 '블루오션 전략'을 내놓으면서 그 첫 사례로 든 것이 바로 서커스단이다. TV 영화 스포츠 등에 밀려 사양화의 길을 걷던 서커스 말이다. 두 교수는 지난 20년간 세계 100여 도시에서 5000여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미국 시장에서만 연 7000억원 가까운 매출을 올리는 캐나다의 서커스단 시르크뒤솔레이유를 예로 들며 사양기업은 있을지 몰라도 사양산업은 없다고 단언한다. 물론 하루하루 열심히 팔아 돈을 벌어야 하는 비즈니스 현장에서 이런 논의는 자칫 한가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수록 시장의 흐름과 고객의 마음 속을 잡는 데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시장과 고객을 보면서도 수만원짜리 팬티를 생각해내지 못하고 300원짜리 팬티 앞에서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 방법은 내 눈을 버리고 고객의 눈으로 다시 우리 사업을 보는 것이다. 가치란 파는 사람이나 만드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사람, 즉 고객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근 경영 환경은 '최악'이란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국 전체가 사양산업화되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러나 포기하거나 좌절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 최악의 경영 환경에서 오히려 새로운 가치를 찾는 소비자들이 늘게 돼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본의 한 작은 마을에선 태풍으로 사과가 다 떨어져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됐지만 그때 살아남아 매달려 있던 사과를 '합격사과'라고 이름붙여 팔아 떼돈을 번 적이 있다. 태풍을 견뎌낸 사과에서 '합격할 수 있다는 믿음'이라는 '가치'를 찾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기 싶다. 그러나 새로운 기회는 이럴 때 더 많이 나타나게 돼 있다. 고객도 모르는 가치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혁신가들에게는 나쁜 경영환경이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경 가치혁신연구소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