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잇단 과징금에 정통부 통신정책 기조 꼬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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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거래위원회가 정보통신부의 핵심 정책인 유효경쟁 정책에 대해 사형 선고를 내린 사건이다." "정통부의 정책 기조를 믿고 따른 기업만 부도덕한 범법자가 됐다."
공정위가 지난 5월 시내전화 업체들에 대해 요금 담합을 이유로 1200억원대의 과징금을 물린 데 이어 15일 시외·국제전화와 초고속인터넷 업체들에 대해서도 258억원의 과징금 부과 및 시정명령 결정을 내리자 유선통신 사업자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KT를 비롯한 유선통신 업체들은 이번 2차 담합 판정건에 대해서도 1차 시내전화 요금건과 마찬가지로 공정위의 공식 통보가 오는 즉시 행정 소송에 들어갈 계획이다.
유선통신 업체들은 과징금 규모에 따라 다소 입장 차이는 있지만 공정위와 정통부를 싸잡아 비난하는 데는 이구동성이다.
업체들은 우선 이번 판정으로 정통부의 핵심 정책인 유효경쟁 정책이 설 땅을 잃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공정위가 유효경쟁 정책에 대해 공정경쟁 잣대를 들이대는 한 정통부는 불법을 조장하는 부처가 되고 정통부 방침을 따른 업체들은 자동으로 공범이 된다는 얘기다.
그동안 통신업체들은 후발 사업자들이 경쟁할 수 있는 수준에 달할 때까지 과당 경쟁을 지양해야 한다는 정통부의 유효경쟁 정책을 믿고 따랐다.
선발 사업자가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후발 사업자들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번 5건의 담합건도 유효경쟁 정책의 구조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처벌 수위를 낮춰야 했다는 게 업계 주장이다.
통신업체들은 특히 초고속인터넷 담합건에 공정위가 시정 명령을 내린 데 대해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 건의 경우 행정 지도가 명백해 무혐의 결정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예상 외로 시정 명령이 떨어지자 "유효경쟁 정책은 종말을 고했다"고 단언했다.
초고속 인터넷건은 정통부 산하 통신위원회의 행정 지도로 업체들이 협약서를 쓴 물증이 있다.
행정 지도가 있으면 예외 조항에 따라 대체로 무혐의 판정이 내려지는 게 관례다.
그런데 공정위는 시정 명령을 내림으로써 정통부 유효경쟁 정책의 합법성을 전면 부인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젠 정통부의 유효경쟁 정책을 따를 명분이 사라졌다"면서 "공정위의 판정으로 선·후발 업체 간 요금 경쟁이 본격화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공정위가 전체 파이를 키워 발전해야 하는 통신산업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공정경쟁 잣대만 들이댄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며 아쉬워했다.
이번 사건은 자칫 정통부 정책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통신업계가 학수고대하고 있는 '통신과 방송의 융합'을 정통부가 제대로 추진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가 대표적이다.
유효경쟁정책 기조에 따라 가격 조정을 한 업체들을 보호해주지 않은 정통부가 통방 융합이라고 통신업계 입장을 적극 대변해 주겠느냐는 것.통방융합 협상 과정에서도 상대인 방송위원회에 마냥 끌려갈 게 아니냐는 얘기다.
공정위와 정통부의 이중 규제에 정책 불확실성까지 겹치면 업계는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울쌍이다.
1000억원대가 넘는 소송을 치러야 하는 기업들의 추가 비용도 만만치 않다.
이번 담합건으로 정통부도 갑갑해졌다.
규제권과 허가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정통부가 업계에 정책을 믿고 따르라고 하기가 거북해졌다.
업계가 유효경쟁정책 협의를 할 때마다 문건을 요구할 가능성도 높아 대놓고 "날 따르라"고 하기가 껄끄럽게 됐다.
초고속인터넷 부문에서 과징금 없는 시정 명령을 이끌어내긴 했지만 4개 담합건에서 과징금을 맞게 해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정통부가 왜 존재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고기완 기자 dad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