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허스트와 구니코들

정규재 심비어니즈 해방군에 납치됐던 캘리포니아의 허스트 양을 생각할 때면 신주쿠 납치사건의 일본인 여고생 구니코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녀들은 자신을 납치한 범인들에 점차 동화돼 간 끝에 오히려 범인을 지지하고 그들에게 호감과 애정을 나타내는 전혀 다른 얼굴로 변해갔다. 허스트는 결국 스스로 총을 들고 납치단의 일원으로 변신했고 구니코는 자신을 감금·사육한 중년 남자에게 아낌없는 순정을 바치도록 인간 개조 과정을 밟아갔다. 구니코는 나중에 자유로이 놓아졌지만 도망을 가지 않고 자신을 가두고 사육한 남자에게 돌아갔다. 인간 존엄성의 전도라는 면에서 막다른 골목길에 들어선 존재론적 위기 구조지만 그렇다고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납치 상황이 극단적으로 전개될수록,그리고 시간이 경과할수록 납치범에 대한 동정적 이해 현상은 더욱 깊어지게 되는 모양이다. 정신 박약 상황에서 나타나는 이런 현상에는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납치사건에서 따온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이 붙어 있다. 최근의 국내 사례로는 대학교수라는 사람까지 한국전쟁을 거꾸로 말하게 된 것이나,금강산 사업을 둘러싼 논란들을 들 수 있겠다. 경찰(미국)이 없었다면 인질극의 희생(한국전쟁 전사자)이 최소화됐을 거라는 모 교수의 주장이나 "왜 김윤규씨를 내쳤느냐"고 북한이 아닌 현대그룹을 다그치는 듯한 정부를 우리는 달리 설명할 단어를 찾기 어렵다. '북한 이해하기' 같은 속류 민족주의가 일상화되고 나면 '인질이 납치범에 동화된다'는 스톡홀름 신드롬도 우리의 정치 일상에 이미 깊이 스며들게 된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된다. 요즘은 딱하게도 그런 일들이 잦아졌다. 한반도가 북핵의 인질로 사로잡힌 것이 벌써 10년이고 보면 이미 허다한 허스트들과 구니코들이 만들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납치범의 총(핵)은 절대로 우리(인질) 혹은 나를 겨냥한 것이 아니며,납치범과의 대화를 거부한 외부의 경찰에 문제가 있고,오죽했으면 납치라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했겠느냐는 데 일단 동정 공감이 형성되고 나면 납치는 이미 절반의 성공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그것은 북한의 핵 개발을 "이해한다"고 말했던 대통령의 언명이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대로의 전도된 구조다. 일상적 상황보다는 극한적 상황이,개방된 환경보다는 폐쇄적 구조 하에서 그런 정신의 전도 현상은 더욱 일반화된다. 금강산에 폐쇄형 가설 무대를 꾸며놓고 통일 감상주의를 단체 관광상품으로 만들어놓은 것부터가 문제지만 북한이 금강산 관광사업을 하는 한국 기업의 내부 인사(人事)에까지 개입하기에 이른 것은 주객전도요 적반하장이다. 문제는 정부야말로 인질되기를 자청하는 파행의 길을 걸어왔다는 점이다. 대북 온정주의를 증폭시키면서 납치범에게 더욱 강력한 무기를 쥐어주는 방식으로 정부는 대북정책의 줄거리를 삼아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보편적 가치를 외면한 채 애써 속류 민족주의를 읊조리는 것은 그것이 나치즘이 됐건 주체사상이 됐건 사이비 이념 정권들의 상투적 방법이기도 했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등 열린 가치보다는 '우리' 혹은 '공동체'식의 퇴행적 연대의식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고 만 것이다.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좌파이념이 점차 퇴색하고 있다는 것만 해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다. 사회주의 이념이 떠난 자리를 폐쇄적인 열성(劣性) 민족주의가 채워가고 있다면 이는 더욱 위험하다. 베이징 6자회담의 낭보가 날아왔지만 이것으로 핵인질극은 과연 끝난 것일까. 우리들의 구니코는 또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