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판사도 모르는 주식가치

4일 서울중앙지방법원 423호 법정.형사합의25부 이혜광 부장판사의 판결문 낭독에 귀를 기울이던 방청객이 일순 술렁거렸다. 시종 삼성측을 준엄하게 꾸짖던 재판부가 피고인에 대한 죄목을 적용하는 부분에서 다소 애매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판결문의 요지는 "에버랜드 전환사채(CB)를 시가보다 현저하게 싼 값으로 이재용씨 등 4남매에게 배정한 에버랜드 전ㆍ현직 사장은 회사에 손해를 끼친 만큼 배임죄에 해당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들 피고인에게 검찰측이 주장한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의 배임죄'를 적용하지는 않았다. 대신 '업무상 배임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비상장 주식가치를 산정할 만한 법적 기준이 없어서…"라는 게 재판부가 내세운 이유다. 특경가법상 배임죄를 적용하려면 제3자에게 5억원 이상의 이득을 취하게 해야 한다. 이 금액이 5억~50억원 미만이면 3년 이상 유기징역, 50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재판부조차 에버랜드 CB의 저가 발행으로 재용씨 남매가 얻은 이익 규모가 얼마나 될지 가늠하는데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삼성측의 아픈 곳을 자극했다. 전환사채 발행목적에 대해선 "피고인들은 전환사채를 주주우선배정 형식을 가장해 이재용씨 등에게 지배권을 전환할 목적 아래 제3자 배정방식으로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실권주 처리 과정에서도 "이사회가 법상 필요한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으며 실권이 확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재용씨로 하여금 제3자 배정방식으로 실권주를 취득케 했다"며 삼성측의 잘못을 따졌다. 비상장주식의 가치산정이라는 부분에서는 삼성측 손을,나머지 혐의 전부에 대해선 검찰측 손을 들어준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상당수 그룹들은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했거나 전환에 나서고 있다. 사외이사 중심의 독립적이고 투명한 이사회 구성도 유행이다. 삼성도 이 같은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과거에 저지른 행위로 현행 지배구조를 유지하는데 비상이 걸린 삼성이 향후 선택할 의사결정이 주목된다. 김병일 사회부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