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외환위기 8년을 맞는 소회(所懷)

김인호 위기 발발 8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또 다른 경제위기'의 가능성을 놓고 논란이 그치지 않는다. 우리 경제가 만성적인 '위기의 재생산구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위기 당시 정치권,정부,언론 등 우리 사회의 주요 기구는 우리나라,나아가 동남아 외환위기의 진정한 배경과 원인을 밝히고 이로부터 적절한 교훈을 얻음으로써 유사한 위기의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배제하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노력보다도 국민들의 감정에 편승해 국민적 정서를 달래는데 역점을 둔 접근방법을 선택했다. 정권의 불순한 의도가 이에 더해졌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으니 뒷일은 보나마나다. 검찰은 국민정서와 정권의 의도를 등에 업고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는 정책판단의 당ㆍ부를 심리하는 소위 환란재판을 시작했다. 7년에 가까운 세월을 거쳐 최종적으로 대법원의 무죄 확정판결이 있기까지 위기와 관련한 검찰의 기소 내용 전부가 각급 법원에 의해 철저히 부정됐다. 그러나 위기의 모든 내용, 특히 구조적 국제적 원인과 배경 등 본질적인 사항은 원천적으로 사법심사의 한계 밖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국가 기능이 이를 수행한 사실은 지금까지도 없다. 재판 결과가 소위 '환란주범론'으로 표현된 당시 사회의 일반적 인식들에 근본적인 교정을 가져왔는지는 의문이다. 온 사회를 들끓게 했던 이 사건의 역사적 재판 과정을 제대로 모니터한 언론이 하나도 없다는 데서 드러난 우리 언론의 직무유기의 결과다. IMF체제 이후 필요 이상으로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대량 실업이 발생하는 등 외환위기가 경제 전반의 위기로 증폭된 것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불가피한 측면도 있지만 초(超)고금리와 긴축재정 등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거시경제 운용방향을 IMF로부터 요구당하고 이를 수용해 경제운용을 한 데 주로 기인한 것이다. 이는 98년 12월에 이미 IBRD에 의해 지적됐고 99년 4월에는 우리 정부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이 과정에 대한 보다 깊이있는 검토와 분석이 위기 규명의 핵심적 내용이 됐어야 하는데 전연 그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국제적 측면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을 또 한번 드러냈다. 양식 있는 국제금융사회의 전문가들은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에 있어서 국제금융의 구조적 문제와 국제금융 자본가들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이와 관련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국제금융정책의 문제점과 책임의 일단을 인정하고 반성하면서 앞으로 이런 사태가 다시 올 때를 대비해 국제금융제도가 개선돼야 할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어쩌면 부분적이나마 아시아 외환위기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우리는 위기의 원인과 배경을 다루는 국가적 노력과정에서 이런 국제적 측면은 논의조차 된 적이 없다. 국제사회에서 이해되기 어려운 나라였다. '6ㆍ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까지 했던 IMF위기의 본질에 대한 이와 같은 잘못된 인식과 처리과정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위기의 재생산 구조의 배경이 되고 있지 않을까? 또 다른 위기가 온다면 지난번 같은 외환위기의 형태는 아닐 것이다. 우리 경제 특유의 복합적인 위기구조의 배경과 원인에 대한 편견없는 분석과 성찰, 이를 바탕으로 지난번보다 더욱 심각할 수도 있는 또 다른 위기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제구조를 만들려는 노력을 우리 사회 전체, 특히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하고 있지 않는 데 진정 위기의 소지가 있다고 본다. 긴 세월의 재판 과정을 끝내고 늦게나마 국가로부터 형사보상까지 받아 개인적인 질곡(桎梏)에서는 벗어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필자가 깊은 아쉬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소이(所以)다. ihkim@kosb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