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시장 개방 폭풍전야] (上) 텃밭을 지켜라

한국 로펌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내년부터 문을 열어야 하는 법률시장의 개방 폭을 결정할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 당장 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다. 게다가 한국과 미국 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본격화됨에 따라 법률시장 개방 압력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보다 먼저 법률시장 빗장을 푼 일본 독일 등에서 대부분의 토종 로펌들이 외국계 로펌에 의해 초토화된 바 있다. 내년부터 법률시장을 열어야 하는 한국도 개방의 후폭풍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오카모도 게이이치로 제2도쿄변호사회 부회장은 "한국의 상위권 로펌 규모가 일본과 비슷한 점을 감안할 때 법률시장을 전면 개방한 지금의 일본 수준에 상응하게 문을 열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철도(JR) 도쿄역 마루노우치 남쪽 출구에서 마루빌딩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 북서 방향으로 10분쯤 걸어가면 최근 리모델링한 메이지야스다생명 빌딩이 눈에 들어온다. 1934년 완공된 메이지생명관과 조화를 이루며 마루노우치 거리의 대표적 관광 명소로 손꼽히는 곳이다. 그러나 일본 변호사업계가 바라보는 눈길은 곱지 않다. 10층에 입주한 세계적인 영국계 로펌 '링클레이터스' 때문이다. 2004년 7월 일본 내 로펌 6위(변호사수 기준)인 법률사무소 미쓰이야스다(변호사 70명)를 합병한 링클레이터스는 국제거래와 무관한 변호사 20여명을 한꺼번에 내쳤다. 외국 로펌이 피합병 로펌 소속 변호사가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내쫓은 것은 처음이어서 일본 열도가 경악했다. 같은 해 4월 법률 개정으로 '외국인의 일본 변호사 고용 및 동업 허용'을 밝힌 지 불과 3개월 만의 일이라 충격의 강도는 더했다. 기미토시 야부키 일본변호사연합회 국제실장은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졌었다"고 회상했다. 영·미계 대형 로펌의 글로벌화 전략에 세계 각국의 로펌들이 속속 무릎을 꿇고 있다. 거대 자본과 축적된 노하우,통상마찰이라는 강력한 무기 앞에 '텃밭'을 내놓고 있다. 일본은 1987년 4월 굳게 닫혀 있던 법률시장 문을 처음 열었다. 이후 일본은 시장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18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개방했다. 하지만 개방의 결과는 처참했다. 상위 6~20위 중형 로펌 15개 가운데 절반이 넘는 8개가 합병 등의 형태로 영·미계 로펌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도 국내외 대형 로펌들로부터 끊임없이 합병하자는 러브콜을 받고 있다. 소속 변호사 수가 150명을 넘는 1~5위 대형 로펌들에 대해서만 아직 외국 로펌의 입질이 없는 상태.하지만 젊은 변호사들이 외국 로펌으로 잇따라 자리를 옮기고 있는 데다 국제 거래 및 인수·합병(M&A)건 수임을 둘러싼 국내외 로펌 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어 언제까지 토종 로펌의 '간판'을 유지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태다. 독일도 영·미계 로펌의 먹잇감이 됐다. 단일 국가로는 법률시장 규모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독일은 1998년 법률시장 문을 열었다. 개방하자마자 영·미계 로펌이 물밀듯 들어와 독일 로펌을 집어삼켰다. 독일 로펌업계 3위인 퓐더가 1999년 영국계 로펌 클리포드 챈스에 합병되는 것을 신호탄으로 이듬해 변호사 350여명으로 독일 1위 로펌이었던 브룩하우스가,2001년에는 남아 있던 독일 토종 로펌 중 가장 큰 오펜호프 래들러가 각각 영국계 로펌과 합쳤다. 그 결과 현재 독일 10대 로펌 가운데 순수 토종 로펌은 헨겔러 뮬러와 글라이스 루츠 두 곳만 남았다. 중국은 2002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할 때 국내 로펌들에 미칠 충격을 우려,외국 로펌의 분(分) 사무소 설치만 허용했다. 중국 최대 로펌인 킹앤우드의 파트너 뚜후이리 변호사는 "이미 외국 로펌들은 소송 이외에는 사실상 모든 분야의 업무를 하고 있다"며 "더 이상의 추가 개방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젊고 유능한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외국 로펌 선호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외국 로펌들은 중국 로펌에 비해 2배 이상의 높은 연봉을 주고 있다. 하지만 1998년 시장을 개방한 호주를 눈여결 볼 만하다. 개방에 앞서 구조개혁을 단행하는 등 준비를 단단히 해왔기 때문이다. 변호사 간 경쟁 촉진을 위해 개혁 방향을 설정한 뒤 변호사 업무가 전문 직업인의 고유 영역이라는 틀을 깨버렸다. 법률서비스를 하나의 비즈니스로 인식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호주는 변호사가 회계사 등 전문직업인과 동업을 할 때 변호사가 다수를 차지해야 한다는 규정을 없앴다. 이어 2001년에는 세계 최초로 일반인들이 로펌에 주주나 이사로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 결과 영·미계 로펌에 합병당한 로펌이 전혀 없다. 단지 미국 로펌인 베이커&매킨지가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호주 5대 로펌 디킨스의 켈빈 호브굿브라운 변호사는 "호주 로펌들은 그동안 규모와 경쟁력을 키워왔다"며 "고객인 기업들에 빠르고 정확한 법률서비스를 제공한다면 개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 김문권(시드니)·김병일(도쿄) 차장 정인설(프랑크푸르트)·김현예(런던) 유승호(베이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