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스님은 풀 쑤고 서암 스님 뒷간 청소… '근대 선원 방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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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겨울 석 달씩 선원에서 안거(安居)하는 수행자들은 각자 역할을 분담한다.
밥 하기,반찬 만들기,찻물을 끓이고 우려 내기,땔감 만들기,타종하기 등에서부터 화장실 청소,정원 관리에 이르기까지 소임이 세분돼 있다.1941년 수덕사 능인선원에서 동안거에 든 성철 스님(당시 31세)의 소임은 장삼에 먹일 풀을 쑤는 '마호(磨糊)'였다.
당시 조실은 만공 스님,현재 덕숭총림의 방장인 원담 스님은 조실을 모시는 시자(侍者)였고,원담 스님에 앞서 방장을 지낸 벽초경선 스님은 청소(掃地·소지)를 담당했다.
이런 것을 세월이 지난 다음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하는 선원이지만 각자의 역할을 커다란 붓글씨로 쓴 '용상방(龍象榜)'을 벽에 붙여놓는 한편 안거에 참여한 대중의 명단과 소임,나이 등을 '방함록'이라는 기록으로 남기기 때문이다.
근·현대 선원의 안거기록을 모은 '근대 선원 방함록(近代 禪院 芳啣錄)'이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에 의해 발간됐다. 한국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로 꼽히는 경허 스님이 본격적으로 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한 1899년 동안거부터 1967년 하안거까지 해인사 퇴설선원,수덕사 능인선원과 견성암 선원,범어사 금어선원,직지사 천불선원,도리사 태조선원 등 6개 선원 1만여명의 수행기록을 담고 있다. 안거 시기와 선원,소임,법호와 법명,나이,출가본사 등이 자세하다.
해인사 퇴설선원에서는 이 기간 중 2292명이 수행해 한자로 기록한 방함록이 312쪽에 달한다. 1899년 동안거부터 경허 스님이 해인사 퇴설당에서 3년간의 정혜결사를 시작한 이래 제산,용성,초월 등의 빼어난 수좌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경허 스님이 쓴 방함록의 친필 서문과 이듬해 하안거 때 서기를 맡았던 한암 스님의 친필 기록을 볼 수 있다. 또 1947년 하안거 때는 조계종 8대 종정을 지낸 서암(西庵) 스님이 31세의 나이로 화장실 청소를 맡았고,25세의 성수 스님(현 해동선원 조실)은 법당 관리,지난해 말 입적한 범룡 스님(조계종 전 전계대화상)은 34세로 등불을 밝히는 명대(明坮) 소임을 맡은 것으로 나와있다.
범어사 금어선원의 경우 1950년 하안거 때 23명이던 안거 대중이 그해 동안거에는 45명,1951년 동안거에는 58명,1952년 하안거에는 89명으로 급증한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국의 선방이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당시 금어선원 조실 동산 스님은 찾아오는 납자를 다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근대 선원 방함록'의 해제를 쓴 김광식 부천대 교수는 "방함록은 신라에서 조선까지는 없었고,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개항기와 일제 때 새로 생겨난 것"이라면서 "걸출한 선승이나 선사상 위주로 이뤄져온 선불교 연구가 선원이라는 수행공동체 연구로 확대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