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아리스토텔레스, 삼성을 말하다

정규재 가난한 자들을 위해 처음 구제기금이 만들어진 것은 아마도 BC 5세기의 그리스에서였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도 디오니소스 극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돈을 걷기 시작했고 남는 돈은 시민들에게 고루 분배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구제기금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어났고 기금의 명목도 다양해졌다. "시민들에게 기금을 나누어 주는 것은 일단 시작되면 중단될 수 없다. 군중들은 점차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 된다"고 말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철학자는 그것을 지칭해 "민주주의는 곧, 중우정치"라고 정곡을 찔렀다. 중우정치는 우리말로 '떼 바보들의 정치'라고 할만할 테다. 그의 스승 플라톤은 오늘날 '참여'라고 불러야 할,소위 직접 민주주의에 진절머리를 내고 아예 철인정치라는 이상론으로 달아났다. 이 이상론은 나중에 중세 종교정치의 굳건한 토대가 되었다. 국가 예산을 분배에 쓸 것인가 전함을 만들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그리스 민회에서의 격론은 '전함을 건조하는 대신 시민들에게 수당을 나누어 주고 축제도 벌이자'는 안을 번번이 채택하곤 했다. 감성적 언어로 대중을 휘어잡는 전문 선동꾼들이 많았던 탓이다. 헬레니즘은 그렇게 빛을 잃어갔다. 이건희 회장의 8000억원 사회 공헌기금 출연을 둘러싼 최근의 논쟁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역사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그 때와 다를 바 없는 선동적 방법으로,그리고 오로지 국민정서법을 무기로 삼성을 윽박지르는 것을 보면서 나라가 망하게 되는 여러 가지 조건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비록 대철학자요 모든 학문의 원류라고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라 하더라도 '떼 바보들의 정치' 아닌 다른 어떤 말로 이 분별없는 열정의 시대를 정리할 것인가 하는 부질없는 상념도 해본다. "전함 아닌 분배를…" 요구했던 그때의 목소리가 "투자보다는 기부금을…" 요구하는 오늘의 한국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도 모르겠다. 당시로서는 전함이 곧 상업적 투자였다는것은 긴 설명이 필요없을 테고. 또 한사람의 변론가 이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부자로 불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은 재산을 숨기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법률을 위반하는 것보다 부자로 불리는 것이 더욱 위험해졌다"라고…. 음모(陰謀)라고도 할 만한,또는 교묘한 술책이라고도 할 만한 온갖 반기업 법제(法制)를 거미줄처럼 엮어 놓고 기어이 삼성의 목에 올가미를 조여 들어가는 이 시대 한국에서 이건희 회장은 과연 법률 위반을 두려워할 것인가,부자라고 불리는 것을 더욱 위험하게 생각할 것인가. 이소크라테스는 "그 결과 아테네는 점차 탄식으로 가득차게 됐다"는 말로 시대의 조락을 압축했다. '전함이냐 분배냐'는 질문과 다를 바 전혀 없는 투자부진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한국의 법정은 이미 창의적 기업가를 벌주는 온갖 종류의 규제들로 가득차 중세 마녀재판의 고문실을 방불케 할 정도다. 대주주 지분이 낮아 회사를 빼앗길 가능성이 클수록 지배구조 우수기업이라며 상(賞)을 준다 이름을 높인다고 방정을 떨고 있으니 이다지 가소로운 짓도 없다. 부자의 그것을,혹은 기업 소유주의 그것을 가장 쉽게 빼앗을 수 있는 장치를 시장을 통한 규율이라고 강변하고 투자를 적게 할수록 재무구조가 우량하다는 따위의 허깨비 놀음은 또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 한쪽에서는 3류 투기세력이, 다른 쪽에서는 얼치기 좌파들이 한토막 작은 생선을 찢어 발기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