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휴 교수의 경제사 산책] (1) 마셜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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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소련 및 동구권 계획경제 붕괴 이후 이들에 체계적으로 원조할 필요에 관한 논의가 많다.
마셜플랜 경험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시도도 있는 것 같다.
마셜플랜(공식명 유럽부흥계획 ERP)은 1948~1951년에 미국이 서유럽 14개국에 약 120억달러(요즘 가격으로 약 1000억달러)를 공여와 대부 형태로 제공한 일을 말한다.
흔히 서독 '라인강의 기적'이 마셜플랜 덕분인 양 언급되곤 한다.
하지만 서독경제 재건에 투자하는 것이 마셜플랜의 주목적은 아니었다.
당시 독일경제 회복에는 이 원조보다 독일 본래의 잠재력이 훨씬 더 결정적이었다.
독일의 1948년 불변가격 자본스톡은 전시파괴를 제하고도 1936년보다 10% 높은 수준이었다.
독일내에서 1930년대 말 이래 있은 투자 덕이었다.
전후 독일에는 양질의 노동력도 많았다.
마셜기금 가운데 패전국 독일이 받은 금액이 가장 많았을 것 같지만 실은 영국 프랑스에 배분된 액수가 각각 독일보다 2배이상이었다.
원조금은 경제규모가 아니라 무역에서 발생하는 달러적자크기에 따라 배분되었다.
서독시장경제회복의 시발점은 마셜플랜이라기보다는 통화개혁(1948년6월)이었다.
통화개혁 이후 배급제 대신 화폐임금이 시행되면서 이윤추구 유인이 생겼다.
생산성이 높아지고 수출환경도 좋아졌다.
서독 수출은 1948~1952년에 5배 증가했다.
증가분 중 90%가 금속,기계,운송장비 등 공산품이고 수출상대국은 특히 서유럽국가였다.
서독은 1차대전 이전 유럽무역에서 했던 역할을 되찾은 것이다.
유럽이 자본재 수입을 미국에서 할 필요가 없게 되면서 유럽의 달러부족사태가 호전되었다.
1958년에는 유럽통화들의 달러태환도 가능해졌다.
서독통화개혁이 오히려 ERP 성공의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마셜플랜은 서독이나 서유럽의 경제회복에 기여도 하지 못한 채 단지 미국이 냉전기에 소련 팽창을 막고자 추진한 정치· 외교도구에 불과했던가? 그렇지 않다.
ERP원조는 유럽총투자액의 10% 정도로 규모는 중요치 않다.
하지만 1차대전 이후 전후문제 처리가 독일에 대한 복수심에 입각한 서툰 것이었음에 비추어 ERP가 추구했던 목표들 즉,생산 증대,무역확대,금융안정,각국 간 경제협력 등은 의미가 컸다.
ERP의 이런 노력은 국제협력을 이끌어 결국 세계경제 회복에 도움을 주었다.
마셜원조조건 가운데 수혜국들이 원조금 사용계획을 공동으로 제출해야 하는 규정이 있어서 결국 유럽경제협력기구(OEEC)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볼 때 유럽경제 공동체(EEC)도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후신이라기보다 마셜플랜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셜플랜으로 OEEC 회원국은 유럽지불동맹(EPU)을 만들고 이 운영자금을 미국이 제공했다.
EPU는 전반적으로 적자국에 강제로 만성 적자를 치유하게 하고 흑자국의 흑자를 줄이도록 유도하였다.
이로써 유럽은 쌍무계약과 무역장벽에서 점점 벗어났다.
또한 다자간 지불체계를 만들고 유럽을 달러나 스털링지역에서 분리시키지 않으면서 유럽 내 무역을 확대시켰다.
한 마디로 EPU는 '지역적 브레튼우즈 체제'였다.
IMF는 이를 과도기적 예외로서 인정했다.
유럽 내 생산,무역이 늘고 금융도 안정되면서 유럽교역조건이 호전되자 각국 생활수준도 향상되고 분배갈등도 완화되었다.
특히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사회당 공산당을 무마하고 중도파 입지를 강화했다.
공여와 대부형태의 외화는 재건을 위한 수입대금으로 쓰였다.
수입업자가 수입대금을 자국화폐로 정부에 지불하면 정부의 달러화계정에 대충자금(counterpart funds)이 만들어져 투자,공채상환에 쓸 수 있었다.
정부가 이 자금을 쓰려면 ECA(ERP의 집행부)의 동의가 필요했다.
미국은 그런 방식으로 유럽국가로 하여금 시장기구 범주 내에서 경제회복을 추진하게 유도한 것이다.
마셜플랜은 정치불안,소비재부족,금융혼란으로 인한 '시장위기'를 극복하고 물가,환율안정,시장에 대한 믿음을 제공한 면에서 중요한 몫을 했다.
원조액 크기보다는 일정기간,특정 경제목표를 달성할 지침을 마련하고 이에 따라 원조가 제공된 점이 주목된다.
마셜플랜경험을 옛소련,동구권의 시장경제건설에,혹은 북한경제개방에 원용하는 일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일찍이 시장경제를 일으켜 발전시킨 역사를 가진 서유럽자본주의나라와 구공산권나라 간에는 역사적 공통점도 별로 없다.
시장행위를 보장할 법,제도장치도 이들 나라에는 없다.
이들에 생산성철학을 이전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다.
마셜플랜때와 달리 1990년대 이후에는 민간자본시장에서 전세계로 장단기자금이 이동한다.
이에는 재정안정,민영화,규제완화,무역개방,행정효율을 막론하고 아무 개혁조건도 덧붙지 않는다.
이러한 민간투자는 시행착오 위험이 더크며 물가,금융정책을 불안하게 할 소지도 있다.
몇 년 전 모 정치인이 북한에 마셜플랜이 필요하다고 연설했을 때 그는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했을까?
dyang@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