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 탄생시킨 정지원 이사 "브랜드 이름 하나로 세상을 움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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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아파트 '래미안(來美安)'에 살고 있는 A씨는 출근길에 티머니(T-money)카드를 충전하고,사이언(cyon)폰을 통해 하이닉스 주가를 파악한다.
주말에는 친구들과 함께 KTX를 타고 부산으로 놀러갈 생각이다.
A씨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각종 브랜드들은 기발한 아이디어의 창조물이다.
브랜드메이저의 정지원 이사(34).그는 고객의 뇌리에 아로새겨지는 상품이름과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현대판 작명쟁이다.
그가 소속된 브랜드메이저가 탄생시킨 상품명과 브랜드는 수백 개에 이른다. GS건설의 상징 '자이',현대전자의 새 사명 '하이닉스반도체' 등이 대표작이다.
GS건설의 강창식 홍보부장은 "고급스럽고 세련된 도회 감각의 네임이 필요했는데 '자이'는 그 모든 것을 충족시켰다"고 극찬했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정 이사는 자신의 언어 능력과 섬세한 성격에 맞는 일자리를 찾은 끝에 브랜드 개발 회사에 입사하게 됐다.
"상품 비즈니스 과정에서 언어를 아름답고,의미있게 전달하는 작업이 핵심이라는 사실에 매료됐습니다."
정 이사는 입사 후 5년 동안 브랜드네이밍 작업을 하면서 한창 커리어를 쌓아가던 중 외환위기를 맞았다.
기업들이 신제품 출하를 중단하면서 브랜드 개발 수주도 끊겼다.
회사가 브랜드네이밍을 중단하고 CI(기업이미지 통합·corporate identity) 기획과 디자인 분야로 방향을 돌리면서 정 이사도 기로에 섰다.
"당분간 실업자가 되더라도 자신만의 분야를 심화시키기로 결심했지요."
첫 직장에 대한 미련을 뒤로 하고 브랜드네이밍을 할 수 있는 현재의 직장으로 옮겨 7년째 일하고 있다. 이제 업계 베테랑으로 평판이 높다.
"요즘 경기가 풀리는지 주문이 확실히 늘었습니다."
한 개의 상품이름을 만들어내기까지 제안서를 작성하고 의뢰인측과의 인터뷰,국내외 특허 검사 및 조사,1·2차 과정 평가 등을 거친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1개월에서 4개월 정도 걸린다.
"글로벌 경쟁시대이다 보니 기업들은 한국 고객은 물론 지구촌 고객들의 눈길을 잡을 브랜드를 원합니다. 글로벌 감각에다 한국 상품 특유의 분위기를 믹스하려면 패션흐름은 기본이고 심지어 국제 정세까지 꿰고 있어야 합니다."
정 이사가 팀을 이끌고 만든 대표작이 '하이닉스' 브랜드다.
현대그룹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현대전자는 새 사명을 놓고 경쟁을 붙였다. 국내 내로라 하는 브랜드네이밍 회사는 전부 경쟁에 뛰어들었다.
"4개월간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개발에 몰두했습니다. 최종 발표일에 우리 작품이 낙점됐다는 통보를 받자 한순간에 피로가 싹 가셨죠.이 맛에 합니다."
이런 열성과 노력 덕분에 초창기엔 건당 의뢰가가 평균 400만원 정도였지만 유명세를 타면서 요즘은 평균 2000만원으로 높아졌고 2억~3억원짜리 프로젝트도 심심찮게 들어온다.
최근 들어 브랜드메이저는 상품작명에 그치지 않고 해외 리서치 등 비즈니스 서비스 분야를 확대하고 있다.
과욕이 아니냐는 기자의 지적에 정 이사의 준비된 답변이 바로 나온다.
"30~40개 브랜드네이밍 회사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어서 부가서비스를 개발하지 않으면 힘듭니다. 예전엔 A4용지 한 장이면 의뢰회사에서 만족했지만 요새는 6~7장 분량으로 제안서를 써내야 통과될 정도로 고객의 안목도 높고 까다로워졌습니다."
정 이사는 프로젝트를 맡으면 잠잘 때만 빼고 늘 그 생각만 한다.
아니 꿈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도 있다고 한다. 주말에 한강변이나 공원을 찾을 때도 아이디어를 떠올리려고 애쓴다.
정 이사의 후배인 입사 4년차 유지은 대리(29)는 "브랜드는 단순한 호칭이 아닌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서 "정 선배는 새로운 존재를 언어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데 탁월하고 일 추진이 치밀한 배울 점이 많은 선배"라고 말했다.
장성호 기자 jas@hankyung.com
# 브랜드 네이미스트 되려면…
호기심이 많고 다방면에 걸쳐 다양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예리한 시각으로 사람들의 특징을 잘 짚어내는 사람,별명을 잘 짓는 사람이 적격이다.
네이미스트는 제품의 상표나 기업명,도메인명과 같은 이름을 만드는 일을 한다.
이들은 타깃집단의 특성과 제품 및 시장,경쟁자 분석을 통해 제품이나 브랜드가 소비자의 기억 속에 보다 잘 인식되고,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이름을 짓는다.
브랜드 네임은 고객과 제품의 첫인상을 결정 짓는 중요한 요소다.
최근 기업에서도 '브랜드 네이밍'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갈수록 네이미스트들의 활약이 두드러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네이밍 업체에서 보통 한 제품의 이름을 지을 때 4~5명의 팀원이 구성된다.
이들은 소비자의 머리 속에 잘 기억되고 경쟁사와 분명한 차별화가 이뤄질 수 있는 제품이름을 짓기 위해 머리를 짜낸다.
입사시 전공 제한은 없으나 어문학 계열의 전공자이면서 뛰어난 언어감각을 갖고 있다면 유리하고,마케팅적 지식을 갖추는 것도 필수다.
/정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