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우 기자의 일본 리포트] (5.끝)한·일 관계, 새 지평을 바라보며

"아시아 야구의 수준을 높여 아시아 야구계를 한데 합쳐주었다. 이승엽은 4번 타자로 나설 것이다." 미국에서 열렸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홈런·타점(5홈런,10타점) 2관왕에 오른 이승엽(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이 일본으로 돌아온 지난 20일 기요타케 히데토시 구단 대표가 이례적으로 공항까지 마중을 나갔다. '아시아 야구계를 한데 합쳐 주었다'는 기요타케 대표의 말은 이렇게 들린다. "과거 한국 야구는 일본의 맞상대가 아니었지만 이젠 달라졌다. 맞수로 인정한다." 기자가 일주일간 일본을 취재하면서 만난 정·재계,학계 인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국에 대해 '기요타케 조'로 말했다. '욘사마'를 나리타까지 마중 나오는 '일본아줌마'들이 일으킨 한류 열풍은 차치하고 일본을 이끄는 엘리트들의 평가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은 이제 선진국이다. 모든 면에서 대등하게 대화하고 협력할 수 있는 아시아에서 유일한 나라다." (세토 유조 아사히 맥주 상담역) "삼성과 소니는 훌륭한 보완관계다."(주바치 요시하루 소니 사장) "미국과 중국이라는 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발언권을 행사하려면 한·일 경제통합으로 가야 한다."(시라이시 다카시 정책연구대학원 부학장) 한·일 관계의 새 지평은 지방에서도 열리고 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근접하는 부산과 후쿠오카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경제교류는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이게 한다. 한국 남쪽 해안지역에 물류기지 등을 설치하고 양국을 잇는 물류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본 기업들이 급증하고 있다. 한국의 부산권과 일본의 후쿠오카권을 연계하는 각종 비즈니스가 활기를 띠면서 부산에 유학하는 일본 고교생들이 늘고 있다. 온천관광지로 유명한 오이타현의 경우 연간 22만명의 외국인 관광객 중 15만명이 한국인일 정도로 한국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한·일 수교 이후 '대일청구권자금과 대일무역역조'로 상징되는 '일방적인 한·일 관계'가 '수평적 상호관계'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정치쪽에 있다. 현재 양국의 외교 긴장은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 중 한 사람이 퇴장할 때까진 해소되기 힘들어 보인다. 두 정상은 태생부터 판이하다. 고이즈미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처럼 정치명문가 출신이다. 게이오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에 유학하던 중 부친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정치에 입문,자민당 우파로 활약해왔다. 개혁도 소선거구제를 통한 정치개혁,작은 정부,지방지원 축소 등 철저하게 우파,즉 신자유주의적이다. 야스쿠니참배도 노 대통령이 아무리 비판해도 우이독경이다. 고이즈미와 노무현의 공통점이라면 기성세대 기성질서를 뛰어넘어 신세대와 직거래하는 점일 것이다. 아쉽게도 이 공통점은 양국관계에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다. 사토 도시유키 NHK 국제방송국장은 "과거에 대한 기억도 반성도 없는 일본 청소년들의 의식흐름만 놓고 볼 땐 한·일 관계의 장래를 낙관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일 관계는 여러모로 전환기에 접어들고 있다. 특히 오는 9월 고이즈미 총리 퇴임 이후가 주목된다. 후임은 심복인 아베 신조 관방장관이 유력시돼 왔으나 '아시아중시론자'인 후쿠다 야스오 전 관방장관이 급부상 중이다. 전환기일수록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일 관계를 획기적으로 격상시키려면 전후 프랑스-독일 철강산업연대를 통해 유럽연합(EU)의 기초모델을 제시했던 장 모네 같은 비전과 설득력을 겸비한 걸출한 인물이 나와야 한다는 게 기자의 생각이다. 편집국 부국장 lee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