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베끼기

2001년 장안의 화제였던 드라마 '아줌마'에서 주인공의 오빠 오일권 교수는 책 표절 시비에 휘말린다. 역서를 저서로 둔갑시킨 탓이다. 자타 모두 쫓겨나리라 여겼지만 사태는 유야무야된다. 스승이자 선배교수를 만나 문제를 해결하고 온 아내는 "뭐라고 했길래"라는 남편의 물음에 간단히 답한다. "뭐라구 한 건 없어.백 교수가 제 풀에 겁을 좀 먹은 거지.그 양반두 모든 걸 관행대루 해온 사람인데,왜 겁이 안나겠어." 남편의 스승에게 "당신은 과연 자유로운가"라고 말함으로써 '번역서라도 자기 견해를 곁들이면 저서로 봐줄 수 있다'와 함께 '없던 일로 하자'는 결론을 얻어낸 것이다. 드라마가 공감을 끌어낸 건 현실에 비슷한 일이 없지 않아서일 것이다. 실제 우리 사회의 표절과 짜깁기 및 그에 따른 관용은 도를 넘어선 감이 짙다. 너나 할 것 없이 베끼는 통에 누가 누구를 꼬집고 말고 할 것도 없을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어디까지가 표절로 간주되는지 모르는 수도 허다해 보인다. 가요 드라마 등 대중예술 작품은 물론 논문과 책에 이르기까지 표절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베끼기와 짜깁기가 횡행하는 이유는 많다. 양심 부재가 첫째겠지만 '남이 다 하니까'도 있고,들키지 않는 한 고생해서 창작하는 것보다 쉽고 결과가 더 좋을 수 있다는 대목도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펴낸 '알기 쉬운 경제이야기' 중·고생편이 2001년에 나온 '포인트 경제학'(삼성경제연구소)의 복제판이나 다름없어 전량 회수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기막히고 어이없다. 사연인즉 대학교수였던 같은 필자가 이미 출간된 책의 원고를 거의 그대로 다른 곳에 되팔았다는 건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다. 서울대 홍성욱 교수는 저서 '잡종,새로운 문화 읽기'에서 "표절은 학자의 가장 더러운 범죄다"라고 썼다. 출간 계획에 앞서 관련서적을 훑어보는 건 상식이다. 엄청난 예산 사업을 진행하면서 몰랐다면 이상한 일이요,알았다면 같은 필자의 같은 내용에 과도한 비용을 지출한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