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6大 스트레스 시달린다] 협력업체 눈치보랴

국내 굴지의 A그룹 B사 임원들은 토요일이던 지난달 29일 서울 근교 모 골프장으로 '전원 출근'했다.

협력업체 사장단 초청 골프대회 때문이었다.부킹난 속에서 10팀 이상의 시간을 만들어 내느라 한 달 전부터 진땀을 흘린 터.이날도 매끄럽게 대회를 운영하고 끝난 뒤에는 폭탄주까지 받아마시느라 녹초가 됐다.

이 회사의 한 임원은 "예전에는 협력업체에 골프접대 받으러 다니는 선배들을 부러워했는데 이젠 거꾸로 접대에 동원되고 있다"며 바뀐 세태를 설명했다.

요즘 재계에서는 원청업체와 하청업체 사이에 '갑과 을이 바뀌었다'는 자조적인 소리도 들린다.정부가 나서서 '대-중소기업 상생경영'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데다 '감히' 협력업체에 부품단가 인하를 요구했다가 거꾸로 하청업체의 민원 폭주로 '혼쭐'이 나고 있는 현대자동차를 보면서 기업들이 비상경영 속에서도 협력업체 챙기기에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

상생경영은 이미 재계에선 유행이 됐다.

협력업체 공장 설비에 이상이 생기면 한걸음에 달려가 고쳐주고 설비 운영에 대한 컨설팅까지 해주는 상설팀이 생겨날 정도다.C사 L사장은 "우리 회사도 최근에 상생경영 계획을 발표했는데 모 협력업체에서 다른 대기업들은 다 하는데 왜 안하냐고 등을 떠밀어 어쩔 수 없이 발표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D사 구매담당 부사장은 "윤리경영이 자리잡으면서 추석이나 설에 협력업체로부터 선물을 받는 관행은 사라진 반면 도리어 협력업체에 과일 상자 하나라도 보내지 않으면 불안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한 협력업체가 창립기념행사를 열었는데 고객사인 대기업 사장급 임원들이 모두 참석해 줄을 서서 감사패를 받아가는 장면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꼈다"고 덧붙였다.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과거엔 신입사원들 사이에 최고 인기부서였던 구매팀은 이미 '기피 부서'가 됐다.

구매팀에 가서 협력업체와 입씨름 하느니 영업팀에 가서 직접 회사에 돈을 벌어다 주는 게 스스로에게 의미도 있고 회사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재계 관계자들은 "어느 정도까지가 상생경영이고 어느 정도부터가 '협력업체 상전 모시기'인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