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이민자 없는 날'

하영춘 < 뉴욕 특파원 >

'(우리가 없으면) 토마토는 누가 따 줄까(Who will pick your tomatos)?'노동절인 1일(현지시간) 미국의 50여개 도시에서 열린 '반(反)이민법' 반대 시위행렬에 등장한 피켓중 하나다.

중남미의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한 수백만명의 시위대는 이날을 '이민자 없는 날'로 선언,시한부 총파업도 벌였다.

비록 주류사회의 역풍을 우려,부분 파업에 그치긴 했지만 '우리가 없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라'고 윽박지르기엔 충분했다.시위에 참여했건 안했건 미국 불법체류자들의 사연은 기구함,그 자체다.

멕시코 출신 블랑카 페레즈(44·여)는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15년 동안 청소부로 일하면서 꼬박꼬박 세금을 내왔다.그러나 월급을 제때 받지 못해도 하는 일이라곤 속 태우는 게 전부다.

불법체류자란 족쇄 때문이다.

한인 정모군(15)은 작년 '고아 아닌 고아'가 됐다.미국에서 태어나 시민권자인 그는 작년까지 부모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부모가 불법체류자로 적발돼 추방당하면서 지금은 혼자다.

일단 추방당한 사람은 재입국이 힘든 만큼 부모를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도 없다.

이런 기구함을 안고 살아가는 불법체류자가 1100만명에 달한다.

한국출신 불법체류자도 40만명에 육박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아메리카 대륙의 어엿한 주인이었던 인디언을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유럽계 백인이다.

일손이 부족하다며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데려온 것도,중남미와 아시아로부터 사람을 끌어 들인 것도 그들이다.

그래놓고 이제와서 '더 이상 필요없다'거나,'노동은 필요한데 같이 살기는 싫다'는 식이니 후발 이민자의 입장에선 기가 막힐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주류사회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건 아니다.

어떻게 이룩한 나라인데 '이방인'을 선뜻 받아들이자니 마뜩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테러공포에 시달리는 판국인데 불법체류자를 무조건 용인하기도 곤란할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해 싫은 건 싫은 게 사람들의 본성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실은 현실이다.

주류사회가 불법이민자 문제에 손을 놓고 있다가 최근 들어서야 갈팡질팡하는 사이 미국은 정치·경제적 이해에 따라 갈기갈기 찢기고 있다.

더욱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민자들이 유권자 운동을 선언하면서 급속히 정치세력화하고 있다.

이미 백인에 이어 인구수 2위로 부상한 히스패닉이 정치적 결사체를 형성할 경우 멕시코로부터 빼앗아온 서부지역을 정치적으로 다시 빼앗기지 말란 법도 없다.

남의 나라 일에 '감놔라 배놔라'하자는 게 아니다.

한인 불법체류자들의 딱한 사정을 마냥 동정해서도 아니다.

미국에서 일고 있는 현상이 어쩌면 오래지 않아 우리나라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국내의 외국인 불법체류자는 18만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의 처지도 미국내 불법체류자와 엇비슷하다.

이들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이민자 없는 날'을 선언할 수 있다.미리미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