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통이 큰 정치

洪準亨 < 서울대교수·공법학 >

5·31 지방선거 후 불어닥친 월드컵 열풍이 잠시나마 정치를 잊게 해주었다.한국팀 예선탈락으로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붉은 악마들의 함성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지만,정국은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 왔다.

헌법재판소의 신문법 부분 위헌(違憲) 결정을 둘러싸고 여와 야,이른바 '메이저 신문과 그 친구들'이 언론개혁파들과 독한 입씨름을 벌이는가 싶더니,급식파동에 이어 경제와 교육부총리 개각을 둘러싼 갖가지 험담들이 난무하고 있다.

국회는 학교급식법 등 몇몇 법안을 처리하고는 다시 문을 닫아걸었다.그러는 사이 북한은 고집불통 문제아답게 미사일을 쏴 올렸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 기상도(氣象圖)가 요동을 친다.

2006년 여름은 이렇게 수상하고 불안하게 표류하고 있다.장마와 더위가 오락가락하는 동안 냉정을 되찾은 사람들은 다시 짜증이 난다.

경고누적으로 퇴장명령을 받아도 벌써 수없이 받았을 국내정치의 답답한 모습 때문이다.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한나라당이 사학법 재개정을 조건으로 민생·개혁 법안 처리를 거부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태도는 볼썽사납다.지방선거에서 그만큼 전무후무한 성적을 거두었으면 좀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한나라당에 압승을 안겨준 민의는 정부와 집권당의 실정에 준엄한 심판을 내리는데 있었던 것이지 한나라당의 안하무인(眼下無人)식 파업정치,보이콧정치를 추인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진부한 얘기가 됐지만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압승은 정부·여당의 패배와 정치 전반에 대한 불신임의 결과였다.

축구처럼 정치에도 상대방이 있다.

상대방이 빈사상태에 빠지면 의당 승리는 나의 것이 되겠지만,정작 돌아오는 결과는 초라하고 황폐한 것일 뿐이다.

뜻있는 많은 민심은 승자가 독하고 인색한 집착보다는 의연하고 통 큰 아량을 보여 피폐해진 정치를 복원시키기를 기대한다. 상대방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협력을 거부하겠다는 파업정치,마구잡이식 법안 연계 및 보이콧 전략은 경우에 따라 제한적인 성과도 없진 않았지만 결코 승리의 길은 아니었다.

사실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보이콧하고 있는 현안 법안들의 내용을 따져 보면,한나라당이 집권시절 제기하거나 주장한 바 있는 내용,또는 향후 재집권할 경우 추진하게 될 개연성 높은 내용들이 적지 않다.

어차피 여야를 막론하고 17대 국회의 성과물로 잡히게 될 것이고,경우에 따라 한나라당이 차후에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들이기도 하다. 개정사학법은 민주,민주노동당과의 3당 공조 속에 '날치기'란 비난을 받으며 강행 처리됐지만,협상이 가능한 내용을 상당 부분 포함하고 있었고 또 협상이 진행되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협상에는 충분한 시간이 걸리는데,협상이 타결(妥結)될 때까지 다른 현안들을 계속 미뤄 두는 것은 입법권자로서 할 일이 아니다.

'날치기'에 대한 울분이 가시지 않았더라도 법안 처리 연계 방식으로 앙갚음을 할 일은 아니다.

이제 보이콧정치와 연계전략은 버리고 승리의 길을 걷는 의회정치의 성숙한 라이벌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때다.

대한민국 국회는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다른 어느 정당의 것도 아니다.

국회가 일을 제대로 못해도,국회의 이름으로 한 일이라면 그것은 결국 여야 모두의 공동책임으로 돌아갈 뿐이다.물론 정치적 동업자 관계를 강조해 여야간 담합이나 공조를 부추겨서도 안 되지만,의회정치를 저항운동하듯 극한투쟁으로 몰아가는 것도 용납돼선 안된다.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면,아니 박두한 재집권 게임에서 승리하려 한다면 정말 승자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상대방이 응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지 말고 자주적 타결의지로 협력할 건 협력하고 협상할 건 협상하는 진취적 리더십을 보이는 것이 또한 지칠대로 지친 민심을 제대로 받드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