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휴 교수의 경제사 산책] 혁명 이후의 소련경제

세계정상회담의 주제가 에너지 자원의 안정적 확보인 한 누구도 러시아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오일머니를 배경으로 러시아가 세계 강국으로 복귀할지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모스크바의 옛 세력들은 스탈린주의 부활을 외치는 모양이다.

스탈린주의가 무엇인가.

1917년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수도를 모스크바로 이전하고 내전을 치르며 공산화를 추진했다.이 과정에서 이들은 '계급의 적'만이 아니라 경제까지 다 파괴했다.

1920년 소련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17개 지방에서 인구의 50∼90%가 기아상태였다.

1921년의 철강,면직생산은 1913년의 4% 수준이었다.농민,노동자 폭동도 빈발했다.

그러자 레닌은 민간경제활동을 다소 허용하는 신경제정책(NEP)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정치적 측면에서 NEP는 혁명정부가 소련인구의 압도적 다수인 농민과 일시적으로 타협한 사건이었다.경제적으로는 민간교역을 합법화하고 국유기업을 임대했다.

농업에서 민간경영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후 경제는 신속히 회복되어 1926년 산업생산과 농민생산이 전쟁 전 수준에 이르렀다.

노동시간 감소와 기타 혜택을 감안하면 도시노동자 생활도 과거보다 나아졌다.

하지만 NEP는 지속될 수 없었다.

통화 팽창과 가격 통제를 동시에 추구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 결과는 제조업품 품귀와 농민의 곡물 방출 기피였다.

그러한 경제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운행된 NEP로 나라가 혼란해진 틈을 타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했다.

1929년 NEP는 종식되고 사회주의계획경제가 도입된다.



공산주의자들은 수세기 동안 땅을 열망해온 농민이 땅을 소유하게 되면 이들이 보수화해 조만간 체제를 위협하리라고 생각했다.

도시의 농산물 수요를 충족시킬 수도 없고 수출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또한 스탈린은 총력전 공업화에 필요한 총투자액수를 농민의 존재가 잠식한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929년부터 농업집산화를 추진했다.

모든 농민은 토지,가축을 포기하고 강제로 집단농장 회원이 되었다.

부농(쿨락)은 재산은 물론 다 뺏기지만 집단농장에 소속되는 것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굶어 죽거나 '재교육'을 받기 위해 수용소로 보내졌다.

실은 거의 모든 농민이 가난했으므로 쿨락이란 용어는 새 체제에 반대하는 농민이란 뜻이 되었다.

집단농장이 더 나을 것도 없었다.

집산화 이후 경영 미숙과 혼란으로 곡물생산은 1938년까지도 계속 1913년 수준이었다.

농산물 강제 공출로 농민은 더욱 피폐했다.

집산화 과정에서 죽은 농민의 수는 1000만명으로 1차대전 때의 총 사망자 수보다 많았다.

이에 더해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집단농장의 곡물을 과도하게 공출하여 600만명이 굶어 죽는,인간이 만든 대기근(1932)이 발생했으나 이 사실은 수년간 국내외에서 성공적으로 은폐되었다.

집산화는 결국 새로운 사회주의 추진비용을 농민이 부담하게 한 작업이었다.

1932년 말 농민가구의 60%,1938년 93%가 집산화되었다.

스탈린과 공산당에게 농민은 이제 더 이상 잠재적으로도 위협 집단이 아니었다.

1938년 농민에게 소규모 가족 텃밭이 허용되는데(총 경작지의 4%) 이곳에서 소련 총농업생산의 22%가 산출되었다.

스탈린 계획경제의 공업 측면은 농업에 비하면 성공적이었다.

1937년 공업생산량이 1928년의 4배에 달했다.

이 성장은 중공업이 주도했다.

소비재공업 성장은 매우 느렸다.

시베리아 서부의 완전 불모지에 대대적으로 조성되는 중공업단지에 총투자가 집중되었다.

그 시기에 그렇게 급속한 성장을 보인 나라는 소련 말고는 없었다.

또한 어느 나라도 그처럼 높은 투자율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소련 계획당국자는 순수입의 3분의 1 이상이 투자되도록 명령했다.

투자 몫을 빼고 남은 것으로 소비했으므로 생활수준의 향상은 없었다.

노조는 권력을 거의 상실했고 정부가 노동자에게 직업을 할당했으며 개인은 허가 없이 이주할 수 없었다.

공장의 필요에 따라 집단농장에서 노동자를 충원했다.

때로는 특정 지역개발을 위해 장거리 집단이주를 강제하기도 했다.

공장 설계는 주로 해외의,특히 대공황기에 실직한 미국의 고급 엔지니어가 맡았다.

모든 것을 국유화하면 새로운 사회와 인간형이 출현하리라고 믿은 소련의(스탈린의) 실험은 1980년대까지 '존속'됐다.

소련 노동자가 누린 혜택은 노령연금,무료 의료서비스,무료 교육과 탁아 등이었고 직종을 국가가 정해주었으므로 실업은 없었다.

대공황이 확산되고 파시즘이 생성되면서 자본주의가 휘청하던 1930년대 세계 최초 사회주의 경제의 '번영'을 바라보는 서방세계의 진보적 지식인에게 스탈린의 이데올로기가 호소력을 갖기도 했다.

1930년대부터 평등주의 정책은 중단되어 주요 국가적 과제에 기여하는 기술,경영 엘리트에게 높은 보수와 특혜가 주어지고 이들은 정치,예술 엘리트와 함께 새로운 상층 계급으로 떠올랐다.오웰이 소설 '동물농장'에서 풍자했듯이 '더욱 평등한' 층이 생긴 것이다.

서울대 경제학 dyang@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