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CEO 나의 청춘 나의 삶] (7) 오세철 금호타이어 사장

오세철 금호타이어 사장(56)은 젊은 시절 데이트도 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했다.

돈이 없었다.그럴 시간도 없었다.

지독했던 가난은 값싼 소주잔에 취할 수 있는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의 오 사장은 전혀 궁색하지 않다.1974년 입사해 30년 만에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또 공학 박사다.

21개 특허와 5개의 실용 신안을 자신의 이름으로 출원한 국내 최고의 타이어 전문가다.지난 30년 동안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오 사장은 전남 나주군 다시면에서 4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갑자기 가세가 기울면서 그의 고생 길은 시작됐다.중학교(광주서중) 때는 광주에서 누나와 함께 자취를 했다.

그 시절 그는 차비가 없어 백운동에서 학교까지 십리 길을 걸어 다녔다.

우산이 없어 비가 오면 그대로 맞았고 소풍이나 수학여행은 엄두도 못 냈다.

친구들이 형형색색의 과자와 사이다를 싸들고 떠난 텅 빈 교정에서 그는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다.

광주제일고 시절 역시 마찬가지.등록금은 담임 선생님이 대신 내줬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수피아여고 뒷동산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함께 자취하던 누님이 다른 도시에 취직돼 떠났기 때문이다.

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은 조금씩 뒷걸음 치기 시작했다.

나날이 고민은 불어났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느 날인가,해 저문 학교 운동장에 앉아 눈물 흘린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어 온다.

아무런 꿈도,의욕도 가질 수 없었다.

가난은 어린 학생에게 감당할 수 없는 피로였다.

첫 해 대학 입시에 낙방했지만 그래도 대학은 가야 했다.

재수 시절 12개월 중 9개월은 돈을 벌고 3개월만 공부했다.

봄 가을엔 건설 현장의 잡역부로 일하고 여름엔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며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닳아 빠진 검정 고무신 사이로 진물이 흘러나왔지만 "아이스 케~키"를 목이 터져라고 외쳐야 했다.

1967년 전남대 화학공학과 합격증을 받아 들고 다시 울었다.

대학 생활도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대학 1학년 2학기 때 무기 정학을 당했다.

등록금을 구하기 위해 돈을 받고 누군가의 대리 시험을 봐 주다가 적발된 것.그 길로 그는 군에 입대했다.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 가난이다.

그를 궁핍에서 건져 올린 것은 1974년 입사한 삼양타이어(현 금호타이어)였다.

금호그룹 창업주 고(故) 박인천 회장이 1961년 광주 지역에 설립한 대규모 타이어 공장이다.

입사 성적은 33명의 공채시험 합격자 중 수석이었다.

"이제 저도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는 직장에서 사람 구실을 하며 생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습니다."

첫 보직은 연구과 직원.오랜 가난에 짓눌려 있던 그의 잠재력은 이 때부터 폭발하기 시작했다.

입사 2년 만에 연구과장 직무대리로 수직 상승했다.

밤낮 없이 연구에 매달린 끝에 77년 항공기 및 장갑차용 타이어를 국내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펑크가 난 상태에서 시속 80km의 속도로 50km를 달릴 수 있는 특수 타이어는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1978년엔 회사 돈으로 말레이시아의 고무 연구소에 1년 연수를 다녀왔다.

신입사원 시절 그는 3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가난이 징그러웠던 그는 통근 차비 외에는 단 한푼도 쓰지 않고 돈을 모았다.

1975년 중매로 만난 정미란씨(52)와 결혼했다.

월셋방을 전전했지만 단란하고 행복했다.

76년 그의 통장 잔액은 100만원으로 불어났다.

내 집 마련의 꿈은 79년 이뤄졌다.

약간의 융자를 안고 광주시 월산동에 대지 34평짜리 단독주택을 마련한 것이다.

"회사가 없었더라면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먹고 살았겠습니까? 달라진 제 처지를 생각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감사하는 마음을 느낍니다."

연구소 생활은 1990년대 초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 시절 시판된 금호타이어의 신제품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다.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인사고과 덕분에 승진도 빨랐다.

오 사장은 자신이 CEO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연구소장 정도가 알맞은 눈높이라고 여겨 왔다.

금호는 1994년 1월1일 그를 생산 담당 상무로 광주 공장에 전격 투입했다.

평소 오 사장의 원만한 성품을 눈여겨 본 고(故) 박정구 금호 회장의 전략적 결정이었다.

당시 광주 공장의 노사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고 회사의 기존 노무관리 라인은 한계 상황에 봉착해 있었다.

하지만 회사측 사람이 바뀌었다고 노조의 태도가 금세 달라질 리 만무다.

하루에 세 번씩 석 달 동안 현장을 돌았지만 근로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인사를 하기는커녕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 사장은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사표를 내겠다고 말했다.

아랫사람들로부터 인사도 받지 못하는 임원이 어떻게 회사를 다니겠느냐고 했다.

아내는 오 사장의 말뜻을 이해하고 선선히 수용했다.

단,조건을 달았다.

이제 자신이 장사를 해야겠으니 창업 준비를 하는 동안 두 달만 회사를 더 다녀 달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아내의 판단은 현명했다.

남은 두 달 동안 노사 관계는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노조는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행태를 지양했다.

근로자들이 오 사장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현장에 매달렸다.

오 사장에게 연구 활동과 생산 관리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었다.

노사 관계가 안정을 찾으면서 생산성도 올라갔다.

1996년 회사는 그를 광주 공장장으로 승진 발령했다.

성공적인 '전업'이었다.

결핍도 도를 넘어서면 사람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오 사장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하는 이들에 대한 보도를 봐도 남들처럼 "죽을 용기로 왜 열심히 살아볼 생각을 하지 못하나"라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 사장은 바람 잘 날 없던 자신의 청춘을 곱게 추억하고 있다.

비록 가난했지만 결코 꺾이지 않았던 시절의 노력과 분투에 스스로 갈채를 보낸다.

기업인으로서의 소명의식 또한 이런 경험들과 맞닿아 있다.

"요즘 청년 실업자들을 보면 기업인의 책무가 막중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좋은 기업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가난을 몰아낼 수 있는 첩경입니다."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