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초일류 기업의 '오너십' 리포트] (3) BMW‥'콴트家' 위기땐 직접 나선다

1959년 12월9일 독일 뮌헨.BMW 주주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장에 속속 들어선 소액주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침통했다.

여기 저기서 "바바리아의 자존심인 BMW를 벤츠에 파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우리 손으로 파산 위기에 처한 BMW를 구해내자"라는 고성이 터져 나왔다.이날 주총은 "BMW는 독자 생존이 불가능한 만큼 벤츠에 매각하라"는 BMW 이사회의 권고안을 통과시키는 자리.BMW 지분을 70% 이상 보유한 독일의 유력 은행들이 이미 합의한 만큼 매각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몇 푼 안 되는 BMW 주식을 마치 가보처럼 자식에게 물려주던 바바리아 지역의 소액주주들과 BMW 근로자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기적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시작됐다.한 소액주주가 '전년도 결산에 문제가 있을 경우 10%의 지지만 얻어도 주총을 무산시킬 수 있다'는 정관 조항을 찾아내면서 분위기가 180도 바뀐 것.실제 BMW의 1958년도 회계장부에는 착오가 있었다.

이로 인해 이날 주총은 무산됐고,매각 계획도 일단 백지화됐다.

하지만 당시 BMW는 독자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골병이 들었던 터.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BMW의 앞길은 막막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독일의 유력 기업가였던 헤르베르트 콴트와 그의 이복 동생인 하랄트 콴트가 BMW의 구세주로 나선 것은 바로 이때였다.

바바리아인들이 보여준 'BMW 사랑'에 감동받아 BMW를 살려내기로 한 것.재산을 털어 BMW 지분 50%를 확보한 콴트가(家)는 곧바로 'BMW 재생 작업'에 들어갔고,한치 앞 운명도 내다볼 수 없었던 '미운 오리새끼'는 차츰 세계 럭셔리 자동차 시장을 호령하는 '백조'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콴트 가문,돈을 벌다독일 경제계의 최대 명문가인 콴트 가문의 초석을 다진 사람은 귄터 콴트(1881~1954)였다.

네덜란드 출신 아버지가 운영하던 밧줄 및 섬유업체를 기반으로 사업을 키워 나가던 귄터는 'M&A(인수·합병)의 귀재'였다.

돈을 모으는 데 지나치게 집착해 언론들로부터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활용하는 탁월한 조작자'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배터리 제조업체인 AFA를 비롯해 수많은 기업들을 사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1930년대 말에는 독일에서도 손꼽히는 대그룹을 일구었다.

◆차(車)를 사랑한 '장님 경영자'

1954년 사망한 귄터는 아들인 헤르베르트(1910~1982)와 하랄트(1921~1967)에게 재산을 물려줬다.

당초 헤르베르트는 절름발이에다 장님에 가까운 나쁜 시력 때문에 당초 귄터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리했고 수완도 좋았다.

1932년 미국 필라델피아 배터리 회사에서 6개월간 인턴으로 일하던 시절,75달러를 주고 산 시보레 쿠페를 신나게 타고 다니다 110달러에 처분하고 독일로 돌아왔을 정도였다.

귄터는 깊은 인상을 받았고,헤르베르트는 후계자로 커 나갔다.

1959년 BMW를 인수한 헤르베르트는 자동차 사업에 모든 것을 걸고 열정을 바쳤다.

장님에 가까운 시력이었지만,그에겐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헤르베르트는 BMW가 신차를 개발할 때마다 양산 전 모델을 마치 점자를 읽듯이 이곳 저곳 더듬으며 디자인과 품질을 점검했다.

하지만 헤르베르트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유능한 동업자'를 알아보는 눈이었다.

그는 자신이 1970년에 최고경영자(CEO)로 선임한 에버하르트 폰 퀸하임과 장기간 호흡을 맞추며 BMW를 '최고의 드라이빙 머신'으로 키워 나갔다.

BMW의 주력 제품인 3·5·7시리즈는 이들이 회사를 이끌던 1970년대에 모두 탄생했다.

◆3세대 콴트,'독버섯' 로버 매각을 주도하다

1982년 헤르베르트 사후 BMW의 경영권은 미망인인 요한나와 두 자녀에게 넘어갔다.

헤르베르트의 비서 출신인 요한나는 시력이 약한 남편을 위해 오랜 기간 각종 기업 관련 정보를 읽어준 덕분에 어느덧 남편 못지 않은 사업가가 돼 있었다.

요한나는 이렇게 쌓은 '내공'으로 1982년부터 1997년까지 BMW 감독이사회 위원으로 일하며,BMW의 성장을 이끌었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BMW 감독이사회 위원이 된 슈테판과 수잔나는 그들의 부모가 그랬듯,일상적인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대규모 투자나 M&A 등 중요 사안에는 대주주로서 적극 개입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악의 거래'로 판명난 영국 로버자동차 인수에 대한 책임을 물어 1999년 베른트 피세츠리더 회장을 경질한 뒤 로버 매각을 주도한 것이다.

당시 피세츠리더 회장은 자기 손으로 인수한 로버를 회생시키는 데 안간힘을 썼지만,3세대 콴트가는 '로버 회생에 집착하다가는 BMW마저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BMW는 콴트가의 뜻대로 70억유로의 손실을 입은 채 2001년 로버를 매각했고,BMW는 동반 몰락의 위기에서 벗어났다.2002년 1분기에 BMW의 수익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4배 이상 늘었다.

콴트가는 BMW라는 브랜드를 세계 최고급 자동차로 키우면서 유럽 재계 내에서도 명가(名家)로 부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