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초일류 기업의 '오너십 리포트'] (4) 스웨덴 '발렌베리'..5代 걸쳐 국민기업으로 성장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마르크 발렌베리)의 말씀을 경청하고 함께 얘기를 나눴다.

또 할아버지(마쿠스 발렌베리 주니어)는 나의 실질적인 선생님이셨다.할아버지는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그룹이 당면한 문제와 함께 살았다.

휴가 때 요트를 타거나 사냥을 나갈 때도 그룹의 핵심인사들은 늘 할아버지를 따라다녔다.

나는 그렇게 끊임없이 밀려드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마쿠스 발렌베리 SEB 회장의 일기 중에서) 발렌베리 가문의 경영자들은 어릴 때부터 '프로 경영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훈련을 받는다.

또 선대가 경영에 임하는 의지와 행동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현재 발렌베리가(家) 기업들에 흐르고 있는 기업 문화를 이해하려면 창업주인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1816~1886)의 기업가 정신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스톡홀름(스웨덴)=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

○은행산업에 눈을 뜨다

창업주인 앙드레는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인 1856년,불혹(不惑)의 나이에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스웨덴에서 두 번째로 큰 시중은행인 SEB의 전신)을 창업해 파란만장한 발렌베리 역사의 첫 장을 열었다.그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남쪽으로 200여km 떨어진 린쉐핑에서 가톨릭 주교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앙드레는 평범한 개구쟁이였다.

학교 성적은 시원찮았고 재능도 특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17세에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해군장교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간 앙드레는 은행산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스웨덴으로 돌아와서도 은행업에 대한 자료를 계속 수집하며 연구를 했다.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은 1860년대 스웨덴 경제의 부흥기를 타고 성장가도를 달렸다.


스웨덴 최초로 채권을 발행하고 해외차입을 시도하는가 하면 예금을 유치하는 일에도 열성적이었다.

경영자로서 앙드레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금융과 제조의 동반 발전 가능성에 착안해 선진금융 기법을 과감하게 도입했다는 점이다.

앙드레가 곳곳에 뿌린 자금은 가난한 농·임업국에 머물고 있던 스웨덴을 세계적인 제조국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M&A로 중흥기를 이끌다

스웨덴 경제부흥의 주역인 앙드레는 1886년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는 모두 2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은행 경영권을 이어받은 사람은 앙드레가 혼전에 동거했던 여자로부터 얻은 크누트 아가손 발렌베리(1853~1938)였다.

크누트는 적통이 아니었지만 앙드레는 모든 것을 제쳐놓고 재능만으로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크누트는 해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프랑스계 은행 크레디리요네에서 경험을 쌓았다.

런던과 파리의 금융계 인사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견문을 넓혔다.

크누트가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은행은 유럽지역의 자금 중계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게 된다.

이런 와중에 1911년 개정된 스웨덴 은행법은 발렌베리에게 결정적인 도약의 기회를 제공했다.

개정 은행법은 산업자금이 원활하게 수혈될 수 있도록 은행들로 하여금 일반 기업에 대한 주식 소유와 경영 참여를 허용했다.

이에 따라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도 휘하에 수많은 제조기업들을 거느리게 된다.

○크뢰거와의 결투에서 밀리다

이 모든 경영기반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크누트가 아닌 마쿠스의 두 아들들인 야콥 발렌베리(1892~1980)와 마쿠스 발렌베리 주니어(1899~1982)였다.

이들 앞에는 이바르 크뢰거라는 이름의 호적수가 등장했다.

그는 스웨덴 재계 역사상 최고의 풍운아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성냥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크뢰거는 1920년대 후반 세계 성냥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할 정도로 놀라운 사업수완을 발휘했다.

저돌적인 추진력과 교묘한 계산능력까지 갖춰 '사자와 여우의 지혜'를 겸비했다는 평을 듣는 인물이었다.

크뢰거는 마침내 발렌베리 휘하의 호포스 위프스타바르프 스토라 등에도 손길을 뻗쳤다.

다급해진 마쿠스 주니어는 크뢰거를 만나 거액의 보상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기업들을 지킬 수 있었다.

○에릭슨을 손에 넣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엉뚱한 곳에서 반전의 계기가 찾아왔다. 자신감이 지나쳤던 크뢰거는 미국의 대공황 여파가 유럽에 상륙하면서 엄청난 투자손실을 입으며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했다. 급기야 분식회계 사실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단숨에 파산하고 말았다.

10여년 동안 스웨덴 경제를 휘젓고 다니던 풍운아는 결국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 크뢰거가 파산하자 크뢰거 휘하의 기업들을 놓고 채권자들의 '빚잔치'가 시작됐다. 크뢰거 그룹에 많은 담보채권을 갖고 있던 스톡홀름엔스킬다 은행은 알짜 중의 알짜인 에릭슨과 스웨덴성냥을 건졌다. 이제 발렌베리는 앞서 인수한 자동차 중전기 엔진사업에 전자까지 추가해 명실상부한 대규모 제조그룹의 진용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때의 진용이 지금까지 거의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