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디자이너] 국제 보석디자인 '그랜드슬램' 이룬 홍성민 쥬얼버튼 사장


'보석을 사람 몸에 맞게 입혀 주는 사람.'

보석 디자이너 홍성민 쥬얼버튼 사장(38)은 자신의 직업을 이렇게 정의한다."보석하면 으레 카르티에나 티파니 같은 외국 브랜드만 떠올리잖아요.

서양인의 체형에 맞는 옷을 무조건 입어 왔던 것이나 마찬가지죠.이걸 바꾸는 게 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아내 장현숙씨(39)와 함께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제 보석대회 '그랜드 슬램'을 이뤘다.1993년 다이아몬드 투데이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1995년 제23회 국제 진주 디자인 콘테스트부문과 1996년 다이아몬드 인터내셔널 어워드 다이아몬드 국제 대상을 연이어 휩쓸었다.

"제 처에 이어 두 번째 기록이에요.

그에게 이끌려 이 세계에 입문했으니까 제가 2등인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죠."◆대학 졸업장과 손톱,그에게 없는 두 가지

사실 홍 사장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다.

그는 국내 보석 디자이너 가운데 유일하게 원석을 가공할 줄 아는 인물이다.박해경 서울옥션 이사는 "다른 디자이너들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홍성민씨는 물감 하나하나의 특성까지도 알고 있는 디자이너"라고 평가한다.

그가 원석의 매력에 푹 빠진 것은 1991년 이리 직업전문학교(지금은 한국폴리텍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대학 전공이 전자공학이었어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군대에 가 있는 동안 내내 이 생각만 했어요.

그러다가 보석에 결론이 다다른거죠."

해외 유학의 길도 열려 있었지만 기초부터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생각은 거창했는데 막상 시작하려니까 제대로 된 교육기관이 없더라고요.

일본만 해도 '히코미주노'라는 세계적인 보석 디자이너 양성 대학이 있는데 말이에요.

'장인(匠人)'에 대한 한국의 홀대가 낳은 불행한 일이죠."

직업전문학교에서 1년6개월 동안 하루 꼬박 여덟시간씩 원석을 깎고 다듬는 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1993년 '다이아몬드 투데이' 그랑프리를 거머쥐었다.

"일이 되려니까 해외 유명 브랜드 디자이너와 안면을 트게 됐어요.

그 사람 덕에 전문적인 디자이너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독일 유학 기회를 얻었죠."

지금도 작품을 만들 때면 홍 사장은 작업실에서 하루이틀을 꼬박 보낸다.

연마기에서 손을 떼는 일이 드물다 보니 그의 손톱은 자랄 겨를이 없다.

"보통사람이면 누구나 가졌을 법하지만 저한테는 없는 게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4년제 대학 졸업장이고 또 하나는 손톱이죠."

◆보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보석에 대한 열정 때문에 홍 사장의 '방랑벽'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콜롬비아 브라질 캄보디아 태국 짐바브웨….아름다운 보석이 있는 곳이라면 장소 불문,어디든 가야만 한단다.

"좋은 작품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재료가 필수적입니다.

특히 보석 디자인의 경우 원석의 크기와 순도가 작품 전체의 질을 좌우하죠."

그의 집념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 하나.

"콜롬비아에서 광산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날아갔지요.

현지에서 알고 지내던 일본인 사업가와 함께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는데 갱 두 명이 따라와 돈을 요구하더군요.

돈을 주었지만 총을 쏘더라고요.

동행했던 일본인은 목숨을 잃고 저는 오른 팔에 관통상을 입고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뜻밖의 대어를 낚는 일도 종종 있었다.

호주 원주민에게서 산 지름 32mm에 달하는 초대형 진주를 해외 보석업체에 억대의 금액을 받고 판 것.홍 사장이 원주민에게 지불한 돈은 불과 100만원이었으니 100여배의 이익을 남긴 셈이다.

◆이젠 해외로…

그는 1년에 300여 작품을 내놓을 정도로 왕성한 '예술욕(慾)'을 자랑하는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영감의 원천은 사람."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연상시키는 것을 한두 문장의 짧은 글로 표현합니다.

글이 완성되는 순간 디자인이 동시에 떠오르죠." '혹시 재벌가 자제 아니냐'는 풍문을 들을 만큼 상류층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는 것도 그의 보석에선 사람 냄새가 풍기기 때문이다.

홍 사장의 요즘 관심은 온통 미국에 쏠려 있다.

"1996년에 서울 안국동에서 7평짜리 전셋집에서 시작했는데 2004년엔 뉴욕 피프스 애비뉴에 '쥬얼버튼-ejoque(愛族)'이란 이름으로 회사를 낼 정도로 성장했죠."

국내에선 나름의 성공을 거둔 만큼 한국의 보석 디자인을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싶은 게 그의 꿈이다.

"이달 초에 기술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디자인 벤처자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걸로 내년께 뉴욕 소호거리에서 전시회를 열 계획입니다.

동양적인 의미의 음과 양의 합일에 대한 이미지를 담는 게 제 보석의 색깔입니다.한국의 진짜 예술품을 갖고 우리 보석 디자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당당하게 보여 줄 겁니다."

글=박동휘·사진=양윤모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