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대통령 '열린우리당 당원에 드리는 편지' 전문

우리 모두의 책임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열린우리당 당원에게 드리는 편지

친애하는 당원 여러분. 지난달 28일 국무회의에서의 ‘임기’와 ‘당적’ 관련 발언에 대해 정치권과 언론에서 갖가지 발언과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여야 모두 대통령의 ‘책임’을 다하라고 하고, 여당 지도부는 ‘정치는 당에 맡기고 국정에 전념하라. 당이 나갈 길은 당이 정할 것이니, 당원은 결론을 존중하라’고 합니다. 언론은 대통령의 ‘탈당’과 ‘당·청 결별’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당원 여러분의 마음 또한 매우 무겁고 안타까울 것입니다. 이에 당원 여러분께 국정과 열린우리당 문제에 대한 제 발언의 취지와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대통령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대통령의 직분이 무엇이고 그 책임과 무게가 얼마만한 것인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 한국의 대통령이 대통령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는 상황도 분명합니다.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해 한나라당이 흔들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물론 야당이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정책적 대안도 없고, 대화나 타협도 거부하고, 국회의 절차도 거부하니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사학법 개정 이후 1년여 동안 중요한 법안의 대부분이 국회에서 발목이 잡혀 정상적인 국정수행이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국회에서 부결되면 그에 맞추어 국정을 수행할 것입니다. 찬성도 반대도 없이 결론을 내주지 않으니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산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이 특별히 열심히 하려고 하는 일의 예산을 다 깎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혁신관련 예산은 모두 깎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해마다 예산을 제때 통과시켜 주지 않아서 전국의 행정이 새해 1월 중순까지 발목이 잡히니 새해의 계획도 차질이 생깁니다. 올해에도 또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인사권도 제대로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사사건건 시비가 걸리고 발목이 잡힙니다. 그 중에서도 대통령과 뜻이 맞아야 하는 자리일수록 더 심하게 흔들고 발목을 잡습니다. 여야에서 모두 관리내각, 중립내각, 거국내각 등 여러 가지 제안이 무성합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여야 간의 합의가 없는 한 실행이 불가능한 제안들입니다. 그런데 한나라당은 이런 저런 제안만 해놓고 의논해 보자고 하면 거부합니다.

인사권마저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면 대통령의 직무수행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생각이나 호흡이 맞지 않는 사람과 책임 있게 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당 사람들도 이런 사정을 다 알지는 못하는 모양입니다. 가끔 야당과 같은 주장을 할 때는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반대나 비판만 하는 것과 실제로 일을 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 주면 좋겠습니다.

이런 국정수행의 어려움은 비단 참여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역대 정부 후반기마다 대통령선거를 앞둔 야당의 정치공세와 여당의 대통령과의 차별화로 국정이 어려웠습니다. 문민정부 말기에는 정치권이 대통령 선거에만 몰두하고 여권이 분열되는 등 국정운영이 표류하면서 6·25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IMF 외환위기를 겪은 바 있습니다. 국민의 정부 후반기에도 야당의 공세로 당시 통일부장관이 해임되고, 총리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이 두 번이나 연속적으로 부결되면서 정부가 제대로 일할 수 없었고, ‘신용불량자 급증’ 등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웠습니다. 국정의 표류가 반복되는 구조적인 문제 생각해 보아야
저는 이런 일을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만의 다짐과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이 문제가 단지 대통령 개인의 능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정치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소야대, 그것도 지역구도하의 다당제와 결합된 여소야대라는 최악의 정치구도가 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88년 13대 국회 이후 한국정치는 국회의원 선거마다 여소야대 구도가 만들어졌습니다. ’04년 17대 총선에서 여대야소가 되었지만, 재·보궐선거와 탈당 등으로 다시 여소야대로 전환되었습니다. 과거 유신독재에서는 유정회에 전체 의석의 1/3을 배분하고, 5공 신군부 하에서는 제1당에 비례대표의 2/3를 배정하는 ‘강제적 여대야소’를 통해 국회를 지배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여소야대는 지역구도하의 다당제와 결합되어 정당간의 정상적인 경쟁과 협력정치를 근본적으로 어렵게 합니다. 정책이 다르다면 대화와 타협을 통해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책보다 지역간의 정치적 대립과 불신에 바탕한 지역구도는 대화와 타협을 불가능하게 하고, 규칙과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정치를 낳습니다.

아직도 ‘대권’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이제 한국에서 ‘대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정에 관한 권한은 대통령과 국회가 나누어 갖고 있습니다. 국회는 법률안 및 예산안 의결권, 각종 비준 동의권, 총리 및 주요 직위의 임명동의권과 각료의 해임건의권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통령과 국회간, 그리고 여야간에 대화하고 타협하지 않으면 국정이 표류하고 마비됩니다. 그런데 지역구도하의 대결적 여소야대가 대화와 타협 정치를 봉쇄하고 있는 것입니다.

13대 국회 이후 집권세력은 여소야대에 봉착하자 ’90년 3당합당이나 ‘의원 빼오기’와 같은 방법으로 ‘인위적 여대야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정치불신과 대결을 가중시켰고 참여정부가 청산한 대표적인 구시대 정치문화입니다.

다당제가 보편화된 선진국에서는 대부분 여소야대를 연합정치를 통해 해결하고 있습니다. 정책적 협력과 권력 공유를 통해 책임 있는 다수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물론 양당제 국가인 미국에서는 여소야대가 많이 나타나지만, 대통령과 국회, 대통령과 야당, 대통령과 개별의원간의 교섭과 타협이 정치문화로 자리 잡고 있어 한국과 같은 심각한 국정 교착과 표류 상황이 일상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뿌리깊은 집권 對 비집권의 이분법적 구도로 여야가 갈라지고, 또한 대립과 불신의 지역구도를 통해 대결 정치가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난해 연정을 제안했던 것은 야당과의 협력과 타협을 통해 국정의 교착상태를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연정은 합당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연정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면서도 경쟁하는 것입니다.

물론 참여정부에서 연정은 불가능한 상태이고, 제가 다시 제안할 수도 없지만 연합정치는 한국정치의 발전과 국정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언젠가는 진지하게 고민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독재정권이나 제왕적 대통령제처럼 대통령이 정국을 주도하고 통제할 수 있는 구조와 상황이 아니라면 여야의 협력을 통해 국정의 교착을 풀어나가야 합니다. 더욱이 참여정부는 당정분리의 원칙 아래 대통령이 과거처럼 여당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야당은 연정도 거부하고, 여·야·정 정치협상같은 대화와 타협 제안마저 거부하고 있습니다. 책임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도, 표결을 통해 결론을 내주지도 않는 상황이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이 대통령에게만 혼자 책임을 다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저는 ’87년 이후 반복되고 있는, 지역구도와 결합된 대결적 여소야대 구도와 국정의 표류현상은 다음 대통령도 직면하게 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치권과 언론, 당원과 국민 여러분께서 이제 한국정치의 구조적인 문제와 해결 방안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별화’와 ‘탈당’은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당적 문제를 이야기한 것은 임기 말에 대통령에 대한 차별화 전략과 탈당 압박 속에서 마침내 당적을 포기한 역대 세 분 대통령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언론에 탈당이 기정사실로, 나아가 당정 결별로 보도되어 해명을 했습니다만, 이 문제는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대의를 강조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 열린우리당이 처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해 책임을 통감합니다. 특히 대통령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높지 않아 매우 송구스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통령에게만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창당 이후 지난 3년여 동안 아홉 차례나 당 지도부가 바뀌었습니다. 지도부가 제대로 일을 해보지도 못하고 각종 선거 패배 혹은 언론의 뭇매 등으로 사퇴하는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주요 정책과 노선에 대해 당론을 결집하기도 어려웠고, 매사 지도부를 흔드는 조직윤리의 부재현상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당의 정책과 노선이 정립되지 못하고, 지도력이 흔들리고, 조직윤리가 이완되면서 당원과 국민들에게 준 실망감은 적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 당이 처한 여러 가지 어려움은 대통령과 당 지도부, 당원 여러분 모두 책임을 다하면서 함께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대 정부에서 여당은 어려움에 처하자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통해 이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현직 대통령의 지지도 하락에 부담을 느낀 대통령 후보들이 차별화에 앞장섰습니다. 노태우 前대통령도, 김영삼 前대통령도 차기 대선 후보의 차별화와 탈당 압박 속에 당적을 버렸습니다. 지난 국민의 정부에서도 김대중 前대통령이 총재직을 사퇴하고 탈당하는 불행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별화와 정부-여당의 균열은 당의 지지도나 대통령 후보들의 지지도를 올리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당 지지도와 후보 지지도, 국정 지지도를 하락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여권의 분열과 대통령의 고립으로 인해 책임정치가 실종되고, 국정통제시스템이 와해되어 IMF 외환위기와 신용불량자 양산 등의 어려움을 낳는 한 배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참여정부와 역대 정부는 다른 조건이 많습니다. 임기 말 역대 정부의 도덕성을 뿌리 채 흔들었던 권력형 비리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또한 당정분리 원칙을 세우고 당무에 개입하거나 여당을 통제하지 않았기에, 과거처럼 대통령에 대한 여당의 권력투쟁이 발생할 이유도 없습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의 책임, 그리고 당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싶습니다. 함께 책임의식을 갖고 국정과 당의 어려움을 성찰하고 책임 있는 대안을 마련하기를 간곡히 호소합니다.

영남당도 호남당도, 지역당은 안됩니다
정계개편이나 통합신당을 주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우리당의 정책적·역사적·법적 정체성을 유지·변화·발전시켜서 국민 속에 뿌리내리는 논의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는 어떤 가치와 정체성을 지향하는지, 이에 참여하는 새로운 세력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른 바 ‘통합신당’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리고 어떤 세력이 새롭게 참여하는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민주당이나 특정 인물이 통합의 대상으로 거론될 뿐입니다. 결국 舊민주당으로의 회귀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열린우리당은 중산층과 서민, 남북화해협력을 중요한 가치로 삼고 지역주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자기희생의 결단을 통해 만든 정당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지역주의 정치구도는 대립과 불신을 통해 국민을 분열시키고, 정치 발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지역단위에서는 경쟁을 사라지게 하여 민주주의를 실종시킵니다.

지역주의를 극복하고자 기득권을 포기하고 결단했던 우리당이 다시 지역구도에 기대려 한다면, 이는 역사와 국민과 당원에 대한 도리가 아닙니다.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 등을 통해 완화되고 있는 지역구도가 내년 대선과 맞물려 다시 강화되고 고착화될 것이란 우려를 지우기 어렵습니다.

물론 정당은 선거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당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당의 정체성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당의 진로와 방향은 그 형태가 어떠하든 정책과 노선을 어떻게 변화·발전시킬 것인지를 중심으로 논의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동안 우리당이 보여준 지도력의 훼손과 조직윤리의 실종을 바로 잡는 노력부터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당 지도부나 대통령 후보 희망자, 의원 여러분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당헌에 명시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정통적이고 합법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게 정당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입니다. 저도 당원으로서 당의 진로와 방향, 당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노선에 대해 당 지도부 및 당원들과 책임 있게 토론하고자 합니다.

국정도 어렵고 당 또한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역사의 진보와 시대정신 구현을 위한 열린우리당과 당원 여러분의 역동성과 저력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2006년 12월 3일 아침

노 무 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