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일기

앙리 프레데리크 아미엘(1821~1881)은 세상을 떠난 뒤 비로소 공개된 일기(日記) 때문에 명성을 얻었다. 제네바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했던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생활을 기뻐하며 일기에 담았다. 아미엘은 자신을 지키는 두 개의 기둥을 단순함과 순수함이라고 했다. 이 '아미엘의 인생일기'를 두고 톨스토이는 일기문학의 정수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톨스토이 자신도 63년 동안 일기를 썼다. 어릴 적에 부모를 잃은 톨스토이가 대문호가 된 것은 일기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평생 일기를 쓰면서 내면과 싸우고 세상과 맞섰다. 그의 일기 쓰는 습관은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일기는 자기 자신의 기록이기에,또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기에 삶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 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 해도,자신의 다양한 생각을 정리해서 여백에 채워나가다 보면 어느 한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게 된다.

엊그제 55년간 쓴 일기를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한 박래욱씨의 경우도 그렇다. 6·25전쟁 속에서 아버지는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죽임을 당했고 가족들은 이내 생활고에 허덕여야 했다. 이 고난의 길을 극복해 준 장본인이 바로 일기였던 것이다. 그의 일기 속에는 목욕비 돼지고기값 신문대금까지 미주알고주알 다 써 놓아 우리 경제역사 자료로도 활용될 것이라고 한다.

며칠 전에는 장애인 할머니가 40년 동안이나 입으로 쓴 일기장이 TV에 공개돼 가슴뭉클한 감동을 자아냈다. 22살 꽃다운 나이에 교통사고로 양팔과 한쪽 다리를 잃었지만 일기를 쓰면서 희망의 끈을 붙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일기가 친구도 되고,애인도 되고,때로는 엄마가 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일기는 고독한 사람의 친구가 되는가 하면 위로의 손길을 보내기도 한다. 안네 프랑크나 베토벤,반 고흐,카프카 등도 일기를 쓰면서 위안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흔히 쓸 것이 없어 일기를 못 쓴다고 한다. 쓸 것이 없다는 것을 쓰는 것도 일기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