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불안 내년이 더 문제다] (下) 산별전환.대선겹쳐 노동현장 대혼란 '우려'

도룡뇽 생태파괴를 우려한 지율스님의 단식농성으로 천성산터널 공사가 중단되고 있던 지난해 10월.프랑스 노사현장 취재차 파리에 있는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재 한국대사관을 들렀을 때 대사관 고위관계자로부터 들은 얘기는 자못 충격적이었다.

프랑스의 한 환경운동가가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을 중단시키기 위해 고속철도인 테제베 철로 위에 누워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는데 열차가 그대로 지나가는 바람에 사망했다는 것이다.더욱 놀라운 것은 그 사건 뒤 프랑스 사회의 반응이다.

법과 원칙이 확립된 나라인 탓에 환경운동가의 사망사건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지금도 정부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이 관계자는 "한국에서 비슷한 사건이 벌어지면 온 나라가 뒤집혔을 것"이라며 공권력이 실종되고 있는 한국 정부의 안이한 태도와 그 사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시위 주체들의 탈법정신을 싸잡아 비난했다.

현재 노동현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파업은 정부의 일관성 없는 대응과 공권력의 실종이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과 온정주의가 어우러지면서 법과 원칙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고 이 때문에 노동현장이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는 비난이다.

더욱이 내년에는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대기업 노조들이 대거 산별체제로 전환하는 데다 비정규직법이 시행돼 노동현장에 상당한 혼란이 우려된다.

산별교섭은 이중,삼중교섭으로 인한 사회비용 증가로 내년 노사관계의 태풍의 눈으로 떠오를 전망이다.여기에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시즌이 본격화되면서 노조의 기대심리가 높아져 노사불안을 부채질 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정부나 기업이 법과 원칙을 뒷전으로 한 채 온정주의로 불법파업 등에 대응할 경우 내년 노동현장은 엄청난 큰 혼란에 휩싸일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7월 포항지역 건설노조가 협상 상대가 아닌 포스코를 불법점거한 것도 정부의 공권력 실종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지난해 11월 농민들의 불법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시위자 2명이 사망했을 때 당시 허준영 경찰청장이 진압에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또 과잉진압을 우려해 경찰의 옷에 이름표를 달도록 했다.

경찰의 손과 발을 묶어 놓은 이 같은 조치로 인해 포항지역 건설노조의 불법점거가 감행됐다는 해석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사법당국이 불법행위에 대해 단호히 대처하면 무분별한 불법 행위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며 "참여정부 들어 친노(親勞)정책을 펼친 데다 불법 과격시위를 눈감아준 조치들이 불법을 부추기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6월 미국에서 원정시위를 벌인 한·미FTA협상반대범국민운동본부의 행태를 보면 법과 원칙 준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늠할 수 있다.

미국에선 폴리스라인을 넘으면 경찰이 발포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한 한국의 원정시위대는 거리 시위 때 고분고분 미국의 법을 따랐다.

그러던 시위대가 한국에선 도심 한가운데에서 불법 과격시위를 벌여 시민들에게 큰 불편을 끼쳤다.

정부는 물론 기업들까지 불법파업에 대해 눈을 감아주다보니 파업이 습관화되고 있다.

특히 손해배상을 청구하거나 파업 기간 중 무노동무임금 원칙을 철저히 적용하겠다고 말하다가도 파업이 철회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없었던 일'로 해주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솜방망이 대응으로 인해 파업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현대차 노조는 해마다 무리한 요구를 내걸고 파업을 벌이지만 회사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파업기간 중 임금을 갖가지 명목으로 보전해줘 파업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다.

한국발전산업노조(발전노조)가 38일간의 파업을 벌인 2002년 4월 법과 원칙을 강조했던 회사측은 파업이 끝나자 슬그머니 솜방망이 처벌로 돌아섰다.

회사측은 파업참가자 5372명 중 348명을 해임하는 중징계를 내렸으나 파업이 끝난 뒤 당시 위원장을 빼고 전원 복직시켰다.

민주노총의 정치파업에 대한 대응도 물렁하긴 마찬가지다.

민주노총이 올 들어 10여차례에 걸쳐 총파업을 벌일 때마다 정부는 입버릇처럼 "엄정 대응"을 외쳐댔지만 실제로 취한 엄정조치는 없었다.

정부의 '엄단'이 번번이 말로 끝나자 민주노총은 정부가 엄정대응을 천명할 때마다 이를 '늑대소년' 정도로 취급해 버린다.

파업으로 큰 피해를 당해 손해배상청구를 해도 끝까지 민사상 책임을 묻는 경우는 거의 없다.지난 한 해 동안 기업이 노조에 청구한 손해배상청구 금액은 16개사 187억원,가압류는 14개사 30억1100만원 등이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