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자율금융의 시험대

15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7층 대회의실.팬택과 팬택앤큐리텔에 채권을 갖고 있는 10개 은행 담당자들이 굳은 표정으로 모였다.

팬택계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자리였다.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회의 시작 45분 만에 100% 동의를 거쳐 워크아웃 추진안을 통과시켰다.

부실기업의 원활한 구조조정을 위해 제정한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이 지난해 말 만료된 이후 채권은행간 자율로 워크아웃에 착수한 첫 사례다.이로써 팬택계열은 급한 불을 끄고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를 발표하는 은행 관계자들의 표정엔 '희망' 만큼이나 '우려'도 적지 않아 보였다.

채권은행들이 총대를 매고 일단 워크아웃 절차에 착수했지만 향후 진로는 살얼음판이기 때문이다.당장 이달 만기가 돌아오는 기업어음(CP) 보유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발등의 불'이다.

팬택 CP 및 회사채를 보유하고 있는 제2금융권과 소액 채권자들이 채권회수에 나설 경우 워크아웃 절차는 중단되고 팬택계열은 부도처리와 함께 법정관리 신청 절차를 밟을 수 있다.

채권은행들이 15일 회의에서 '팬택이 워크아웃 기간 중 돌아오는 2금융권의 회사채 및 CP를 결제하면 워크아웃은 자동 파기된다'고 못박은 것도 전체 채권자가 빠짐없이 워크아웃에 동참하라는 강력한 압박 전술로 풀이된다.팬택 워크아웃에 대한 채권자들의 상황은 게임이론에 나오는 '죄수의 딜레마'에 비유할 수 있다.

2금융권과 개인투자자 모두 서로를 믿고 합리적인 선택(워크아웃 동참)을 한다면 팬택을 살리고 채권도 회수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한 곳이라도 개별기관의 이해를 앞세워 채권 회수에 나선다면 결과는 '공멸'뿐이다.

이번 팬택 워크아웃이 '자율금융의 첫 시험대'란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팬택 워크아웃이 성공한다면 한국 금융과 기업 구조조정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

반면 워크아웃이 깨진다면 채권은행간 자율협약은 용도 폐기되고 한국 금융은 관치(官治)를 벗어나 자율을 기대할 수 없는 후진 시장으로 전락하고 만다.팬택계열 채권자들의 성숙한 책임 의식과 합리적 선택을 기대해본다.

유병연 경제부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