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CEO 나의 청춘 나의 삶] (19)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48)의 학창시절을 아는 고향 친구들은 그를 '수재'로 기억한다.

중학교를 수석 졸업했음은 물론 뛰어난 작문 실력으로 큰 상도 여러차례 받았다.하지만 본인 스스로는 "나도 학교 다닐 적에는 꽤나 골때리는 학생이었다"고 술회했다.

이런 평가는 요즘도 마찬가지여서 증시에서는 그를 두고 돈에 대해 '동물적 감각'이 있다고 말한다.

경쟁자들이 볼 때 시기심이 날 정도로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증권시장을 선도하고 있어서다.그 비결에 대해 박 회장은 주저하지 않고 '독서'를 꼽았다.

"부모님께서 공부하라는 말씀은 안 하셨지만 늘 책 읽기를 권하셨지요.

덕분에 독서습관이 생겼습니다." 특히 학창시절부터 전략을 다룬 책에 끌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케네디 자서전, 키신저 자서전 같은 책을 대여섯 번씩 거푸 읽었다고 한다.

"잘 보면 시기마다 시장을 끌고 가는 트렌드가 있어요.

그걸 얼마나 빨리 정확하게 포착하느냐가 성공의 관건이죠.시류를 읽는 눈은 독서에서 나옵니다.그런 측면에서 당대의 석학들이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경영,경제,미래예측서는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으로는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과 세계적인 금융회사 찰스슈왑(Charles Schwab)의 발전사를 다룬 '클릭 앤 모르타르'(Clicks and Mortar)를 꼽았다.

'제3의 물결'에서 정보화라는 말을 처음 접했고 '클릭 앤 모르타르'에서는 인터넷 시대에 맞는 올바른 기업문화와 비전,리더십에 대해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미래 분석의 핵심은 밸런스입니다.

이건 철학적 문제인데요,균형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판단 결과는 180도 달라집니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눈에 보이는 게 곧 진실은 아닙니다.

진실은 늘 현상 저 너머에 있지요."

박 회장이 처음 증권시장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려대 경영학과 2학년 때.돈 관리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으로 어머니가 1년 학비와 생활비를 몽땅 부쳐줘 주식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그 이후 강의를 들어도 주식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 가장 관심이 가고 해서 명동 증권가를 기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관심을 갖다 보니 전체적인 그림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마침내 대학원생이었던 1984년 조그만 사설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

증권 투자로 번 돈으로 서울 회현동 코리아헤럴드 빌딩 18층에 20평 남짓한 사무실을 얻었다.

직원도 한 명 두었다.

그 때가 26세였다고 하니 타고 난 투자가인 셈이다.

당시 증권시장은 소문에 의존하는 엉성한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박 회장은 시장분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분석한 '한국 증권시장에 대한 전망'이라는 자료가 일본 노무라증권 보고서로 탈바꿈해 시장에 회자되기도 했다.

2년 뒤인 1986년,박 회장은 투자자문회사를 문닫고 증권회사 입사를 결심했다.

투자자문회사 설립에 법적 근거가 없는 점과 아직 개인사업자가 독자적 브랜드로 자본시장에 뛰어들 분위기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그의 명성을 익히 듣고 특채하겠다는 증권사도 있었지만 마다하고 동원증권 영업부 사원으로 입사했다.

당시 증권가 최고스타였던 이승배 동원증권 상무(현 한셋투자자문 사장)의 영업스타일과 브로커로서의 자세를 배우고 싶었던 그는 여러 차례 문전박대를 이겨내고 입사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불과 45일 뒤 대리로 승진하는 특유의 실력을 발휘했다.

코스피지수가 처음으로 1000선을 돌파한 뒤 곧바로 폭락세로 돌아서 모든 사람들이 지점 근무를 기피하던 1989년 박 회장은 지점장을 자원했다.
그는 노무라증권의 '퀵 영(Quick Young) 전략'을 벤치마킹해 패기만만한 젊은이들로 영업진용을 새로 짰다.

그의 전략이 맞아떨어져 동원증권 중앙지점은 1993년 1조4000억원의 주식 약정(매매체결액)을 올리며 전국 1위 지점으로 부상했다.

이른바 '박현주 신화'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압구정지점장이 돼서는 2년 연속 전국 증권사지점 중 약정고 1위라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세웠고,1995년엔 최연소로 강남본부장 겸 이사로 발탁됐다.

하지만 1997년 6월 박 회장은 당시 구재상 압구정지점장,최현만 서초지점장 등 8명의 '박현주 사단'과 함께 잘 나가던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미래에셋캐피탈(옛 미래창업투자) 창업을 위해서였다.

"재벌 중심 경제체제에도 장점이 많지만 이제 다른 길을 찾아야 할 때라고 봤습니다."

1998년 말엔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설립한 뒤 국내 최초 뮤추얼펀드인 '박현주 1호'를 성공시켰고,2000년을 전후한 IT주 버블기에는 말 못할 고생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미래에셋은 이제 한국의 대표 운용사로 성장했다.

또 '아시아를 선도하는 금융회사'라는 목표를 향해 누구도 가보지 않은 '해외시장 개척'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박 회장은 요즘 인도 중국 베트남 등으로 직접 다니면서 미래에셋의 도전을 이끌고 있다.
박 회장은 자신의 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국 자본시장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한국 최고의 부자가 되기보다 최고의 기부자가 되겠습니다."

2000년 창업 후 거둔 개인수익의 대부분인 75억원을 기부해 박현주재단을 설립한 것도 바로 꿈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익의 사회 환원은 자선이 아니라 일상적 기업활동이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이런 소신은 활발한 사회공헌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방학 기간을 이용해 경제와 금융을 배우는 '어린이 경제캠프'를 운영 중이며,'미래에셋 글로벌리더 대장정' 프로그램에서는 청소년들의 체험학습을 위해 중국 등지로 보내고 있다.

금융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글로벌 투자전문가 양성프로그램'도 야심찬 프로젝트의 하나다.

올해부터 10년 동안 300여명에게 500억원을 투자해 해외 유수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전액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박 회장은 "1억원,10억원을 투자해 키운 인재가 나중에 100억원,1000억원을 벌어준다면 이보다 더 나은 투자가 어디 있겠느냐"며 "굳이 미래에셋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어디선가 대한민국을 위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면 보람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박 회장의 인생을 관통하고 있고,성공으로 이끈 화두는 '도전'이다.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다르지 않다.

"한국인의 뛰어난 DNA를 바탕으로 세계의 전문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세요.

이를 위해서는 어학실력은 물론이고 글로벌 경험을 통해 자신감을 얻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challenge'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도전의식을 갖고 세계와 만나길 바랍니다."

백광엽 한국경제신문 증권부 기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