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포럼] '반값 아파트'의 추억

추창근 < 논설위원 >

역사에 가정(假定)은 없다지만,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반값 아파트'를 들고 나온 정주영 후보가 당선되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실제로 반값 아파트가 공급됐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정 후보는 기반시설비를 정부에서 지원하고,관청에 뇌물안주고,공기를 단축하면 분양가를 절반으로 낮출 수 있다고 주장했다.

채권입찰제를 폐지해 원가기준으로 분양한다고도 했다.그 땐 집지을 땅도 많았고 지금처럼 땅값이 비싸지도 않았으니 크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 반값 아파트가 내년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쟁점으로 불붙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솔직히 지금의 반값 아파트는 예전보다 더 포퓰리즘적이다.한나라당의 '홍준표 법안'이나,여기에 맞불을 놓은 열린우리당의 '이계안 법안' 어디에도 반값 아파트란 말은 없다.

그런데도 서로 내 방식이야말로 확실한 반값 아파트대책이라고 주장한다.

여·야 할 것 없이 반값 아파트에 매달리는 건 집값 폭등으로 끝없는 절망에 빠진 서민들에게 이보다 더 파괴력 큰 구호도 없기 때문이다.방법이야 어떻든 반값에 아파트를 공급한다면 민심을 단번에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토지임대부'나,'환매조건부 분양' 모두 집을 싸게 공급할 수 있는 방안임에 틀림없다.

무늬만 값싼 분양주택이지 실제로는 비싼 장기임대주택과 다름없다는 반론이 있지만 중요한 건 어디에 어떻게 짓느냐의 문제다.

집 지을 땅이 바닥났고,재정부담은 어쩔 것이냐는 문제 등이 걸림돌이긴 해도 방법을 찾기 나름이다.

당장 살 집이 급한 서민들의 주거복지를 위해서도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정작 따져봐야 할 건 따로 있다.

반값 아파트가 서민들이 평생 벌어도 집을 장만하지 못할 만큼 부담능력을 훨씬 넘어버린 집값을 떨어뜨릴 수 있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집값 상승세에 제동을 걸 수는 있을까.

반값 아파트의 성패는 사실 여기에 달려 있다.

서민들이 반값 아파트에 환호하고 있는 것도 그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그걸 장담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토지임대부'는 땅을 전·월세로,'환매조건부'는 집과 땅 모두 장기 전세로 빌리는 방식이다.

자산(資産)으로서의 '온전한 내집'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얘기다.

제한된 거래는 결국 '반값 아파트 따로'가는 제한적 시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모든 아파트를 토지임대부나 환매조건부로 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집값이 문제가 되는 서울과 수도권 아파트는 2005년 말 기준으로 324만가구다.

지난 몇년 동안 이 곳에 새로 공급된 아파트는 연간 15만여가구 정도다.

아무리 심리에 크게 영향을 받는 부동산 시장이지만 5%도 안되는,게다가 인기없는 지역의 반값 아파트가 집값을 가라앉힐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우려되는 것은 다음 시나리오다.

수요와 공급이 겉도는 반값 아파트 대신 기존 주택의 희소가치가 더욱 부각된다면,반값 아파트에만 매달려 민간분양주택 공급이 더욱 부족해진다면,또다시 집값을 부추기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반값 아파트의 포퓰리즘을 빨리 벗어나야 할 이유다.

kunn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