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디자이너] 김종건 캘리그라피스트 "손 글씨로 감성까지 디자인하죠"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에 가면 두 개의 현판을 볼 수 있다.

'다산초당(茶山艸堂)'과 '보정산방(寶丁山房)'이 그것.'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썼고,'보정산방'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정약용을 보배롭게 만드는 방'이라는 의미로 다산에게 선물한 것이다.전문가들은 이 두개의 현판에 씌어진 필체에는 다산과 추사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평가한다.

'다산초당'은 단정하고 청아한 맛이 있는 반면 '보정산방'은 힘이 있고 활기찬 기운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캘리그라피(calligraphy) 디자이너 김종건씨(37)는 사람의 성격에 따라서도 서체가 다르듯,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표현할 때도 글맛이 달라진다고 강조한다.'캘리그라피'는 '아름다운 서체'란 뜻을 지닌 그리스어 '칼리그라피아(kalligraphia)'에서 유래된 전문적인 손글씨 디자인을 뜻한다.

'폰트(font·인쇄로 찍어내는 글자체)'가 지니는 기계적인 느낌을 극복하면서 서예로 표현할 수 있는 획의 질감과 모양을 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김씨는 '캘리그라피'보다는 '손글씨'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직접 마음을 담아 만든 글자 디자인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해서다.

요즘 각종 제품 광고와 영화 포스터에 사람의 손맛을 살린 글씨가 자주 등장하는 건 캘리그라피의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준다.

디지털 시대 속에서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현대인들의 취향에 잘 맞아떨어지고 있어서다.캘리그라피가 기업의 개성과 정체성까지 나타낼 수 있다는 문화가 퍼지자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삼성의 이미지를 가장 잘 살릴수 있는 전용 서체를 개발하고 있다.

김씨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영화 '복수는 나의 것','챔피언','연인'과 책표지 '질그릇 아내','봉순이 언니',광화문 교보문고에 달린 글씨판 등이 꼽힌다.

'복수는 나의 것'을 만들 때는 '것'의 받침으로 쓰인 'ㅅ'의 모양을 포스터에 찍힌 송강호가 든 칼의 모양과 비슷하게 그려내 영화 속에서 송강호가 연기하는 분노의 감정을 살렸다.

'챔피언'을 디자인 할 때는 유오성의 근육이 주는 느낌을 글씨를 통해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처음 캘리그라피에 눈을 뜬 것은 대학에서 서예학을 전공한 뒤 어느 폰트 개발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을 할 때였다.

우연찮게 일본어 논문의 데이터베이스팀에 들어갔다가 팀장의 소개로 일본 캘리그라피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본 김씨는 충격을 받았다.

순수 미술이라고 생각했던 서예가 상업적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놀라워서였다.

일본에서는 이미 '상업 서도가(書道家)'라는 이름으로 캘리그라퍼의 활동이 활발한 상황이었다.

수십개의 관련 사이트를 보고 김씨는 우리나라에서도 캘리그라피를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김씨는 서울 인사동에 있는 지인의 작업실을 빌린 뒤 자신의 작품을 모아둔 포트폴리오를 들고 무작정 고객을 찾아다녔다.

"그 당시만 해도 캘리그라피라는 용어도 없었거니와 글씨를 돈주고 사는 문화가 없었습니다.

필요하면 서예학원에 가거나 충무로 대필소(代筆所)에 가는 정도였죠."

문전박대 당하기도 여러번.캘리그라피가 뭔지 설명만 하다 거리를 나선 적도 많았다.

사람들의 인식 부족도 문제였지만 그 자신 작품을 좀 더 상업적으로 전환시키지 못한 것도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책과 영화의 내용에 맞게,제품의 컨셉트에 맞게 글자를 디자인해야 했지만 김씨는 전통적인 서예 필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때 도움을 준 사람이 패키지 디자인 회사인 플랜디자인의 김대헌 사장이었다.

김사장은 예전부터 인쇄체보다는 좀더 감정이 살아있는 손글씨를 제품포장과 로고디자인에 사용해왔다. 사업을 위해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다니는 김씨의 모습을 좋게 본 김사장은 제품 캘리그라피를 맡기면서 서예를 상업적인 디자인으로 바꾸는 작업에 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이름을 조금씩 알리게 된 김씨는 2000년께부터 캘리그라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신문광고나 영화포스터 한 작품에만 100만원에서 많게는 500만원까지의 작품료를 받고 있다.

캘리그라피를 전문적으로 디자인하는 '필묵'이라는 회사도 만들어 각종 영화 포스터에서 책 표지와 광고에 들어가는 카피까지 캘리그라피를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그는 요즘 내달 열리는 '한·중·일 손글씨 디자인 현황과 전망'이라는 세미나를 준비하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다.

각 나라별로 손글씨 디자인이 얼마만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지,손글씨 디자인 산업의 문제점은 뭔지 등을 서로 공유하고 해결책을 제시해 보는 게 그의 계획이다.

"서예 문화권 국가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손글씨 관련 세미나입니다.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우리나라의 손글씨 디자인이 어떤 방향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지 살펴봐야죠." 글=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사진=김정욱 기자 ha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