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나는 어디로 간 거야?

이명랑 < 소설가 >

한국의 민담(民譚)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잊기를 잘하는 양반이 하나 살고 있었다. 이 양반은 담뱃대를 들고 길을 가다가 문득 보니 손이 뒤로 가서 담뱃대가 보이지 않으면 "앗,내 담뱃대!" 하고,다시 손이 앞으로 나오면 "아하,여기 있군" 할 정도로 잊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양반이 길을 가다 스님 한 분과 동행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스님은 이런 날 어딜 가십니까?"

"예,초파일이 멀지 않아 건넛마을에 시주를 청하러 갑니다.""예,그러시군요. 그런데 스님은 이런 날 어디를 가십니까?"

"초파일에 쓰려고 건넛마을에 시주를 청하러 가는 길입니다."

"아,그렇군요. 그건 그렇고 스님은 지금 어딜 가십니까?""건,넛,마,을,에,시,주,를,청,하,러,갑,니,다!"

"초파일이 날은 날인가 봅니다. 거참 여러 사람이 시주를 청하러 가네요. 그건 그렇고 스님은 이런 날 어딜 가시나요?"

스님은 그만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 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주막에 당도해서 한 방에 묵게 되었다. 양반이 깊이 잠이 들자 낮의 일 때문에 화가 난 스님은 바랑에서 칼을 꺼내 양반의 머리카락을 싹 밀어 버리고서 줄행랑을 쳤다. 다음날 양반이 갓을 쓰려고 머리를 만져보니 상투가 없는 맨머리였다. "여보,주인 양반!"

"왜 그러십니까,손님?"

양반이 자기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내 말 좀 들어 보오. 어제 스님하고 나하고 둘이 잤는데 지금 여기 스님만 있으면,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간 거지요?"

"예?"

"아,내가 어디로 갔는지 말 좀 하란 말이오!"

양반은 주막집을 나오면서도 계속 머리를 만지면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나는 어디로 간 거야?"

이 이야기 속의 사내는 평생 건망증이라는 병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도 담뱃대가 보이지 않으면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의 한계 내에서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간다. 스님과 동행하게 되었을 때도 스님을 괴롭힐 마음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님을 노하게 만든다. 화가 난 스님은 사내의 머리까지 밀어버린다. 그리하여 사내는 마침내 자신마저도 잃어버리게 된다.

이 이야기 속의 사내에게는 건망증이 그의 한계였던 것처럼 누구나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건망증 같은 것들을 하나씩은 안고 살아간다. 어떤 이는 가난을 안고 살아가고,어떤 이는 암과 같은 병과 싸우며 살아가고,어떤 이는 재능 없음을 견디며 살아간다. 삶이 다하는 날까지 나름대로는 열심히 자신의 한계와 싸우며 살아가는데도 이들의 속내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은 이들에게 화를 낸다. 심지어는 화나게 했다고 응징하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는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데도 그들의 조건이나 한계를 이해할 마음조차도 없는 사람들에 의해 상처 입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존재 의미마저도 잃어버리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이 이야기 속의 건망증 심한 사내와 똑같은 처지가 되어 "나는 어디로 간 거야?"라고 되뇌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그가 잃어버린 스스로를 찾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일까?

누군가 한 사람쯤 그의 속내를 이해하고 그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한계 속으로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잃어버린 스스로를 찾아가는 그의 여정(旅程)이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