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의 삼성 20년 - (上) 파괴와 도전의 역사] 실패 두려워않는 역발상 경영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은 임직원들의 구태와 무사안일,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깨는 데서 시작됐다.

이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선언을 앞두고 '비교 전시회'라는 것을 처음 열었다.소니 마쓰시타 필립스 지멘스 등 세계 일류기업들의 제품과 삼성 제품을 같이 진열해 놓았다.

이 회장은 책상 위에 놓인 삼성 제품들을 일일이 망치로 내려치면서 "모든 제품들을 새로 만들라"고 사장들에게 호통을 쳤다.

"VTR 부품 수가 너무 많다" "브라운관의 독창성이 부족하다" "리모컨 조작이 불편하다" 등 이 회장의 질타는 끝이 없었다.당시 삼성 조직에 대한 이 회장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다.

1987년 취임 이후 끊임없이 변화와 개혁을 강조했지만 임직원들은 '국내 최고'라는 허명(虛名)에 안주하고 있다는 것이 이 회장의 판단이었다.

이 회장은 기존 관행과 질서를 뒤흔드는 충격요법을 가하지 않으면 공멸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꼈다.이 회장은 1993년 6월7일 이른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신경영을 선언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7월7일.이 회장은 전대미문의 '7·4제(7시 출근-4시 퇴근)'라는 새로운 근무지침을 내렸다.

출퇴근 시간을 한꺼번에 2시간이나 조정한 이 조치는 "변해야 산다"는 절박감을 불어넣기 위한 비상 수단이었다.하지만 파괴는 새로운 도전을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이 회장은 두렵고 고독했지만 과감하게 도전했고 결단을 내렸다.

그는 역발상의 귀재였다.

1988년 도시바 NEC 등 대부분의 반도체 선발업체들이 셀(cell)을 기판 아래로 쌓는 트렌치 방식을 고집했을 때 이 회장은 위로 쌓는 스택 방식을 선택했다.

결과는 이 회장의 승리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업체들이 불황을 우려해 설비투자를 축소할 때 오히려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스택방식을 도입한 뒤 D램 세계 1위에 오르기까지 걸린 기간은 불과 4년이었다.

2001년도 비슷한 상황.당시 이 회장은 낸드플래시메모리 1위였던 도시바로부터 합작 제의를 받고 고심을 거듭했다.

정보기술(IT) 버블이 꺼지면서 IT업체들의 수익력이 악화되고 있던 시기였다.

실패의 부담을 감안하면 합작에 응해야 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자체 경쟁력과 향후 시장 전망 등에 대한 참모들의 보고를 토대로 독자 추진을 결정했다.

결과는 대박.삼성전자는 휴대폰 디지털카메라 MP3플레이어 등으로 급성장한 낸드플래시시장의 60%를 장악하며 도시바를 멀찌감치 따돌렸다.

휴대폰 사업 역시 파괴와 도전의 역사를 거쳤다.

삼성전자는 1995년 구미공장에서 500억여원어치의 불량 무선전화기를 태웠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 삼성 휴대폰은 전 세계인들로부터 명품 대접을 받고 있다.

휴대폰 버튼위치 변경은 이 회장이 만들어낸 작은 '혁명'이었다.

이 회장은 1993년 "언젠가 모든 사람들이 한 손에 휴대폰을 쥐게 될 날이 올 것"이라며 "편한 조작을 위해 맨 아래쪽에 있는 통화버튼을 숫자버튼 위로 올려라"고 지시했다.마치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얘기였지만 삼성이 위치를 바꾸니 모든 업체들이 따라왔다.

이 회장 특유의 자유로운 발상이 없었더라면 쉽지 않았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