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들의 세상사는 이야기] (8) 배영호 코오롱 사장 "배 곯을때 샐러리맨 되기로 결심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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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들의 세상사는 이야기] (8) 배영호 코오롱 사장 "배 곯을때 샐러리맨 되기로 결심했죠"< 한경 기자들과 5시간 人生 토크 >
배영호 ㈜코오롱 사장은 최고경영자(CEO) 경력만 9년째다.'기업의 별'로 불리는 임원생활만도 18년을 했다.
배 사장에게는 '적자기업 구원투수' 또는 '소방수 CEO'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우연찮게도 적자기업만을 맡아 흑자기업으로 바꿔놓은 이력 때문이다.적자에 허덕이던 코오롱제약을 살려놨고,코오롱유화의 성장기반을 닦아 놓은 게 좋은 예다.
잦은 노사분규로 흔들리던 ㈜코오롱까지 보듬어냈다.
훤칠한 키와 서글서글한 인상에 유머감각도 수준급이다.아쉬울 것 없었던 지난 인생에 대해 그는 "화투 뒷장이 잘 붙었다"고 겸손해했다.
하지만 5시간에 걸쳐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눠보면,그가 어느 정도의 노력파인지를 금세 알게 된다.
서울 중림동의 한 닭꼬치집에서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와 갓 입사한 수습기자들이 배 사장을 만났다.
# 나는야 '낙천맨'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는데.
"CEO 중에 고생한 사람들이 80%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저도 어릴 때부터 고생 많이 했죠.고생해야 이룰 수 있는 것 아닌가요.(배 사장은 '無汗不成'이라고 쓰인 액자를 들어보였다)"
-무슨 뜻이지요.
"무한불성….말 그대로 땀 없이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얘기죠.집 응접실에 걸어놓고 항상 되새기고 있어요.16년 전에 글씨 쓰는 한 지인이 제게 써준 것이죠.이동찬 명예회장께서 준 그림과 이 액자가 제 보물입니다.또 아끼는 액자가 있는데,구미공장 노조사무실에 걸려 있는 '상생동행(相生同行)'이란 글씨예요.지난해 말 노사 등반대회에서 노조원들과 함께 새긴 글씨죠."
-연세(만 63세)에 비해 젊어 보이신다는 얘기 많이 들으시죠.
"젊어 보인다는 말 많이 들어요.최근 모 대학교에서 여성 CEO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는데,코오롱제약의 회생 경험담을 들려주다 보면 관련 질문은 하나도 없어요.대신 젊어 보이는 비결이 뭐냐는 질문만 하죠.(지나가던 음식점 주인이 40대 중반처럼 보인다는 말을 보태,좌중은 웃음바다가 됐다)"
-비결이 있나요.
"원래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라서 그런가 봐요.골치 아픈 일은 처리한 후 딱 잊어버리죠.하루 30분씩 운동도 빼먹지 않고요.아침도 꼭 먹어요.기본에 충실하면 되죠.사실 경영이나 건강유지나 다 기본에 충실한 게 중요해요.공부도 마찬가지죠.벼락치기로 공부한다고 성적이 오르나요."
-원래 건강 체질이신가요.
"원래는 약골이었어요.어릴 때 집이 어려워 시래깃국,청국장 등만 먹었는데 요즘은 이런 음식들을 '웰빙'식품이라고 하대요.그래서 건강해졌나?(웃음)"
-운동은 꾸준히 하시나요.
"지난해 회사 내에 설치된 '실천의 벽'이란 곳에다 실천목표를 운동으로 적으면서 시작했죠.하루에 운동을 30분씩 했어요.사실 회사 직원들끼리 서로 보니까 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실천의 벽'에 올해는 뭘 적으셨나요.
"네 가지를 적었어요.한 달에 한 번 공장 방문하기와 일주일에 한 사람 이상씩 칭찬하기죠.또 뭐더라,아 신규사업과 관련해 한 달에 한 번씩 체크하기.마지막으로 창립 50주년 행사 준비하기죠.잘 지켜야 하는데…."
#배불리 먹는 게 꿈
-어릴 때 꿈은 뭐였죠.
"초등학교 때 이사만 열 번 정도 다닐 정도로 집안사정이 어려웠어요.아무 생각이 없었죠.세 끼 밥 잘 먹는 게 꿈이었다면 너무 불쌍한가….소풍 때는 부추김치만 싸갔죠."
-왜 섬유공학을 전공하셨나요.
"말하자면 길어요.어렸을 때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쫄딱 망했어요.초등학교 1학년 때쯤이죠.이후 엄청 고생했어요.고등학교 3학년 때는 입주과외도 했어요.(당시 제일모직 공장장이었던 조필제 세양주택 회장의 집이었다)그래서 사업보다는 샐러리맨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기왕이면 월급이 많은 섬유회사에서….당시 대구에서는 잘 사는 집 아들 딸들은 십중팔구 아버지가 섬유사업을 했으니까.섬유가 엄청 잘나갈 때죠.그래서 한 해에 30여명이 배출되는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지원했어요."
-학창시절은 주로 어떻게 보내셨나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만 했고 대학교 시절에는 사회성을 높이기 위해 많은 활동을 했죠."
#직장인과 신뢰성
-직원들 인사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뭐죠.
"어느 위치에서나 잘 적응하는 사람이 최고지 뭐.저는 신입사원들에게 항상 입사 3년 후 부서 이동시에,부서마다 서로 데려가려고 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어느 곳에서든 적응력이 뛰어나야 좋은 인재라는 얘기죠."
-직장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요.
"(주저없이)신뢰성이죠.직장 상사,동료뿐만 아니라 모든 대인관계에 있어 약속을 지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예전에 영업 업무를 담당할 때였어요.한번은 제품가격이 2.55달러인데,타자를 잘못 쳐서 2.35달러로 문서를 보냈죠.그런데 실수로 문서가 잘못됐다고 연락하지 않았어요.우리가 실수한 건에 대해서는 2.35달러로 계산한 후 나중에 솔직히 실수를 말하고 다음부터 정상 가격으로 처리해 달라고 했죠.제품 가격을 바꾸자고 하면 신뢰성에 손상이 생길까봐 그랬어요. 이후 그 거래처와는 장기 거래를 하게 됐습니다. 비즈니스 관점에서 보면,길게 보고 장사를 해야 한다는 얘기죠."
-이직이나 사직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나요.
"한 번도 없었죠.사실 한 번 있었어요.(웃음)첫 임원 승진을 앞두고 이사에서 탈락한 후 잠깐 쇼크를 받은 적이 있었죠.당시 사장님을 찾아 뵙고 따졌어요.나는 이사가 될 자격이 있다고.다른 회사로 가겠다는 얘기도 꺼냈죠.당시 사장님은 '당신은 충분히 임원될 능력이 있으니까 늦게 되면 오래 할 수 있어 좋다'는 얘기를 하더라고요.참을 수밖에 없었죠."
-영업 현장에서 뛰는 '영업맨'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저는 영업사원들에게 어떤 회사에 가면 꼭 화장실을 보라고 해요.청소 상태를 보라는 거죠.화장실이 깨끗하면 절대 부도가 안 납니다. 장담합니다."
-말 안 듣는 부하직원이 있으면 어떻게 하세요.
"직원들을 보면 크게 두 가지 타입이 있죠.혼을 내면 기가 죽는 스타일이 있는데 이런 직원들은 칭찬을 해서 사기를 북돋워줘야 합니다. 반대로 혼나면 오히려 더 잘하는 친구들도 있죠.더 잘해서 인정받아야겠다며 이를 가는 스타일이죠.참고로 저는 후자 스타일입니다."
# 돈 이야기
-회사 생활하시면서 월급엔 만족하시나요.
"사실 신입사원 시절에는 내 봉급이 얼마인지도 몰랐어요.과장 진급할 때까지도 잘 몰랐으니까요.따져봐야 봉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적게 쓰면 되는 것 아닌가요."
-돈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뜻인지.
"그건 아니죠.그래도 CEO인데요.사업 할때 채권,비용,회계 장부 등은 엄청나게 따지죠."
-댁이 타워팰리스라고 하던데.
"참내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요.(웃음)사실은 전세예요.솔직히 전세라도 좋은 집에서 살아보고 싶었거든요.어려서 너무 힘들게 생활해서 그런것 같아요.다른 좋은 집도 한 번 살아볼 계획입니다.대신 용인에 은퇴 후 살기위한 조그만 집을 하나 마련해뒀어요."
-재산은 어느정도세요.재테크는요.
"그냥 먹고 살 만해요.얼마라고 말하면 너무 적을 수도 있고,반대로 너무 많다고 할 수 있으니 봐주세요.(웃음)재테크는 별로 소질은 없는 것 같아요.은행에 간접투자 상품도 이용하고 정기예금에도 들었어요.나름대로 포트폴리오를 대충 짜놨죠"
-돈은 주로 어디에 쓰세요.
"평소에 외식을 많이 하니까 밥은 집에서 먹을려고 노력하죠.은퇴한 친구들과 식사할 때 돈을 쓰는 편이죠.제가 현역이니까요.그래도 5만원 안팎이면 충분해요.별로 돈 쓸 시간도 없고요."
# 구원투수 인생
-입사 후 고생 없이 승승장구하신 건가요.
"(배 사장은 한바탕 크게 웃었다.) 처음부터 장난이 아니었어요.입사 후 처음으로 대구공장 현장에 갔죠.2년 후 본사 기획부로 발령이 나서 갔더니 구미공장 프로젝트를 담당하라는 거예요.공장 증설 기획이죠.정말 주말도 없이 일했어요."
-해외 지사 생활도 하셨죠.
"1975년 말에는 뉴욕 지사를 설립한다고 해서 미국으로 갔죠.영어부터 배웠어요.미국 수출 기반을 다지느라 정말 고생했죠.사표 던지고 현지에 눌러 앉는 사람도 많았어요.그때 저도 그냥 있었으면 미국에서 세탁소나 채소 가게를 운영하고 있겠죠.(좌중 웃음)"
-귀국 이후는요.
"그때부터가 문제예요.정말로 저는 적자 부서로만 배치됐었어요.입국해 발령 난 곳이 존폐의 기로에 서 있던 타이어코드 사업부였으니까요.당시 가동률이 50%도 안 됐죠.근데 약 2년 후 흑자 사업으로 만들어 놨어요.이후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죠.지금은 회사 매출액의 40%를 차지하고 있으니,격세지감을 느낄 정도죠."
-어떻게 적자 사업을 흑자로 돌려 놓으셨나요.
"거래선이 문제였어요.거래처가 금호타이어(당시 삼양타이어)밖에 없었으니까.그 회사가 파업하면 우리까지 망할 판이었어요.안 되겠다는 생각에 미국의 굿이어를 뚫었죠.납품을 성사시켰더니 다른 업체들은 덩달아 납품이 성사되더라고요."
-이후는 편하셨나요.
"말도 마세요.1992년에 원사 본부장으로 발령 났다가 96년께 구미공장 노조가 골치 아프다고 해서 그 곳 공장장으로 내려갔어요. 노조 문제 때문에 골치 아팠죠.그러다가 98년에 코오롱제약 겸 코오롱유화 사장으로 발령 났죠.당시 코오롱제약은 부도 직전이었습니다.팔려고 해도 살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코오롱유화도 1600억원 정도 매출을 유지하며 근근이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죠.코오롱제약을 중환자 병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나오게 해 퇴원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2년 후쯤에야 흑자로 돌아섰죠.지금 이익률이 그룹 내 최고일 겁니다.코오롱유화는 덩치를 키우는 쪽으로 신경 썼고요."
-구원 투수 역할을 주로 하시는데 화나지 않으세요.
"팔자가 그런가 보다 생각해요.그래서 CEO를 오래 하나.(웃음)"
-㈜코오롱 대표이사로 옮기시고 난 후는 어땠나요.
"2005년 12월 이웅열 회장께서 저를 불렀어요.㈜코오롱을 맡으라는 거였죠.당시 노조 문제로 한창 골치가 아플 때여서 걱정했죠.그때 생각했습니다. 이게 내 팔자인가 싶었죠.역시 제일 어려운 게 노사 문제였어요."
# 유머 수집
-사장님은 재미있는 Y담(야한 이야기)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던데.
"한 350여개 정도 알고 있어요.15년 정도 모았으니까."
-수집하는 이유가 있나요.
"수집이라기보다는….팔방 미인이 돼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죠.어떤 모임이나 자리에서 좌중을 이끌고 대화하려면 노래,골프,Y담 등 못하는 게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그래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으면 집에 가서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죠.특히 CEO가 되면 모든 만남에서 자기 자신을 남에게 잘 기억시키는 게 중요한데 Y담이 효과적일 때가 있어요.제가 Y담 때문에 모 협회에 매번 초청도 받아요.(웃음)"
# CEO론
-국내 및 외국 CEO 중에서 존경하는 인물은.
"CEO는 비전을 제시하고 인재를 육성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하죠.그런 면에서 잭 웰치(미국 GE의 전 CEO)를 꼽고 싶어요.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탁월한 안목과 실행력을 갖고 있죠."
-CEO의 역할론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신뢰성에 기반한 리더십이 첫 번째죠.그리고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어야 합니다.물론 방향을 제시하고 인재를 부릴 줄 알아야죠.특히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동기 부여입니다.칭찬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장점을 드러내 주고 칭찬을 하면 긍정적인 효과가 나오게 돼 있습니다."
-은퇴 후 계획은 있으신가요.
"특별한 계획보다는 집사람하고 여행이나 실컷 다니고 싶어요.기회가 되면 Y담 책도 내고요.(웃음)"
-벌써 자정이 넘어 저희가 만난 지도 무박 2일째가 됐습니다.긴 시간 동안 얘기를 들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좌우명은 무한불성(無汗不成)
"어떤 일이든 땀을 흘리지 않고는 절대 이룰 수 없다는 얘기죠.좌우명이 적힌 액자를 집 응접실에 걸어 놓고 항상 되새기고 있습니다."
#.젊음의 비결은 낙천적인 마음
"남들이 10년은 젊어 보인다고 하데요.원래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살아서 젊어 보이나 봐요.골치 아픈 일은 처리한 후 바로 잊어버리죠."
#.재테크는 '꽝'
"재테크는 별로 소질이 없어요.금융 상품을 이용하는 정도죠.그냥 먹고 살 만하면 되고…. 돈 모아서 재벌 될 것도 아닌데요 뭘…."
정리=손성태·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
사진=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