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들의 세상 사는 이야기]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 "매사 끝장 보는 성격"

▶▶▶ 한경 기자들과 4시간30분 人生토크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은 "회사 부도 내고 한강에 뛰어들 뻔한 못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15여년간 외도를 청산하고 1995년 크라운제과의 '구원 투수'로 나선 지 3년 만에 부도를 냈던 일에 대한 자평이다. 그러나 윤 회장은 오뚝이처럼 일어나 크라운의 몸집에 비하면 거인이나 다름없던 해태제과를 품에 안는 기적을 이뤄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을 현실로 바꾼 힘은 무엇이었을까. 술잔과 함께 풀어낸 그의 이야기 보따리 속엔 젊은이 뺨치는 뜨거운 열정과 미래에 대한 꿈,도전 정신이 넘쳐났다. 말끝마다 터지곤 하는 큰 웃음은 듣는 이를 끌어당기는 마력을 지녔고,천일야화처럼 끝없이 쏟아내는 아이디어들은 둘러앉은 '주반(酒伴)'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난 14일 저녁 서울 남영동 해태제과 사옥 근처의 한 고깃집에서 한국경제신문 생활경제부 기자들과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4시간 반에 걸쳐 들려준 그의 이야기는 아무리 자주 들어도 물리지 않는 오페라 아리아를 듣는 느낌이었다. (윤 회장은 오페라가 종합예술이어서 감성을 자극하는 데 그만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

-고깃집에 누드화가 걸려 있네요.

"(주인을 돌아보며)여기 참 수준 있네.때마침 동백꽃도 활짝 피었고 말이야.고깃집에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그림이 걸려 있으니 얼마나 좋아.안 그래요?"-두주불사형이라고 들었습니다.

"옛날에야 '술은 마셔 없애자'는 주의였지.직원들이랑 산에 올라가면 꼭 '정상주'를 먹는데 이게 또 제맛이에요. 산에 올라가면 오감이 다 열려.막걸리도 좋지만 향으로 치면 코냑이 제일 좋아요. 직원용으로 나눠준 잔에 한 잔씩 먹는데 한 병이면 40~50명 정도 먹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거 어쩌나. 어제 치과에 가서 임플란트 치료해서 오늘은 마시지 못하겠네.대신에 기자들 내일 속 편하라고 내가 '소설주(소주와 설중매를 5 대 5로 섞은 것)' 만들어 줄게.내가 소설주 제조엔 도사거든요."

#매사를 끝장 본다-회장님은 뭐든 시작하면 끝을 보신다고 들었습니다.

"30대 초반시절 인천에서 과자포장기계 만드는 공장을 직접 차려서 독립했을 당시 기술자들이 너무 속을 썩였어요. 내가 기술에 문외한이라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안되겠다 싶어 관련 서적을 사들여 독학을 했습니다. 열 권쯤 읽으니 기계에 대해서 대충 알겠더라고요. 직접 기름장갑 끼고 작동해 보니 별거 아니더라고요. 그때부터 직원들을 부릴 수 있게 됐어요."

-등산할 때 같은 산을 세 번 오르내리는 삼봉을 하신다던데,그것도 '끝장론'과 통하는 겁니까."크라운제과가 부도위기에 몰린 뒤 골프채를 놓고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 봉우리에 오르고 두 번째 봉우리를 올라도 양에 안 차더라고요. 지리산은 하루에 천 몇백m씩 올라가는데 작은 산에서는 그게 안 되죠.서울 근교의 산에서 지리산 등반만큼의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생각해 낸 게 같은 산을 서너 번 반복해서 오르는 것이었죠.계속 올라가는 것보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지루하죠.그러나 끈기와 마음의 힘,'심력'으로 하면 가능합니다. 일년에 네 번은 사봉을 시켜요. 그래야 삼봉의 즐거움을 알죠.사봉을 하다 삼봉을 하면 만족감이 다르거든요."

-애창곡도 피나는 노력 끝에 터득하셨다면서요.

"노래방 기계가 처음 나왔을 때 친구집에서 '봄이 오면'을 부른 적이 있는데,어느 순간 모두 사라졌어요. 다들 딴방에서 웃고 있더라고요. 사람들이 음정 박자 다 무시한다고 놀려대더군요. 그래서 노래를 배우기로 작심했죠.당시 노래꾼들 사이에선 조용필의 '허공'이 가장 어려운 노래로 통했죠.'허공'을 1절만 녹음해서 귀에 꽂고 하루종일 돌아다녔어요. 3주 정도 하니까 어느 정도 노래를 하겠더라고요. 그러나 원곡과 내가 부른 걸 비교해서 들어보니깐 형편없었어요. 그래서 석달을 더 연습했죠.웬만큼 되기에 다른 노래를 비슷한 방법으로 배워나갔습니다. 한 달에 한 곡씩 마스터했죠.그 다음에는 친구들만 만나면 노래방에 갔습니다. 크라운에 와서도 직원들한테 노래시켜서 다들 고생을 했죠.그때 고생해서 배운 '허공''친구여'가 제 애창곡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안다

-산전수전을 꽤 겪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크라운제과가 부도났을 때는 특히 힘드셨겠습니다.

"1998년 정월 초였어요. 회사를 떠나 있다가 1995년에 선친이 부르셔서 돌아온 지 3년이 조금 안 된 시점이었습니다. 단돈 2억원을 못 막아서 최종 부도처리됐어요. 처음 회사로 돌아와 자금사정을 보니까 단기 채무가 너무 많았어요. 대부분 자금을 장기자금으로 돌려놨는데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보험회사 등에서 연장을 해주지 않는 거예요. 1월8일에 돌아온 110억원가량의 어음은 선친의 개인 돈을 털어서 간신히 막았어요. 하지만 16일에 돌아온 2억원은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꼼짝없이 부도맞을 수밖에.자동차 운전에 비유하자면 제가 미숙했습니다. 안개가 좀 꼈다고 그냥 가로수를 들이박아버린 거였지."

-불상사는 없었나요.

"사채업자들이 집으로 찾아와 협박을 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배에 힘 팍 주고 당당하게 대처했습니다. 나를 살려서 받을 것인지,이 자리에서 죽이고 돈을 날릴 것인지 택하라고 도리어 윽박질렀죠.내가 도망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다들 조용해지더군요. 지금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때 직원들에게 밀린 봉급 주고 회사 문 닫자는 주장을 따르지 않은 거예요. 만일 그렇게 했다면 지금의 나와 회사가 있을 수 없었겠지요. 채권단에서도 제가 사기 치고 빼돌린 게 아니란 걸 알았죠.(경영권이 유지되는) 사적화의로 갈 수 있었던 것도 주변에서 그런 스토리를 알았기 때문이고요. (화의가 시작된 뒤)안개가 걷히고 난 다음에 보니 차도 멀쩡하고 승객도 괜찮더군요.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화의 상태로 꽤 오랫동안 있었는데.

"돈 갚을 능력은 진작에 생겼지.2004년 해태제과 인수 신청서를 넣을 당시에 M&A(인수합병) 중개업자들이 화의기업이라고 자료도 잘 안 주더라고.안되겠다 싶어 2주 만에 화의 종결하고 증명서를 보여줬지."

-다윗이 골리앗에게 덤빈 셈인데,사내 반대도 심했을 텐데요.

"다들 웃었어요. 그때 해태는 크라운 매출의 두 배가 넘었거든(2004년 해태제과 매출은 6187억원,크라운제과는 2897억원이었다).자료 좀 얻어오라고 했더니 '그러다 해태제과 안고 쓰러진다''환자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등 반대가 심했죠.직원들을 설득했습니다. '예전에야 큰 회사가 작은 회사를 먹었지만 지금은 빠른 회사가 느린 회사를 먹는 시대다'고 강조했더니 다들 저를 믿고 따라왔습니다."

-자금 사정은 괜찮으셨습니까.

"웬걸요. 그래서 군인공제회를 찾아갔지요. '해태제과가 민족회사 아니냐.그런데 지금 외국사람들이 경영하고 있다. 내가 찾아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공제회도 심정적으로 찬성하더라고.그때부턴 우리 실력을 보여줘야 했는데 대한제분 등 협력회사들한테 십시일반으로 도와달라고 '사정 반 압력 반'으로 부탁했어요. 이 돈에다 회사채 250억원을 발행하고,공제회 돈 지원받아서 해태제과를 사게 된 것입니다(크라운컨소시엄의 해태제과 인수 최종 금액은 5000억원대).하려고 마음먹으니까 안 되는 게 없더라고요."

# 자전거포 주인이 꿈이었던 청년 시절

-연세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셨죠.

"졸업장도 없는데 뭐….3학년 무렵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거든.귀국하고 25세 되던 해에 중매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바로 결혼했습니다(부인은 이화여대 경영학과 2학년 때).크라운제과에 이때 입사했고요."

-가업을 물려받는 것 외에 다른 꿈은 없으셨나요.

"어릴 적 꿈은 자전거포를 여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기계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뒷날 기계회사를 차렸는지도 모르죠."

-크라운에 입사한 뒤 어떤 걸 많이 배우셨습니까.

"선친이 날 많이 믿어주셨죠.제가 아이디어를 많이 냈거든요. 특히 기억나는 건 도매상 체계를 없앤 것입니다. 어느 날 방산시장에 갔는데 한 도매상이 '크라운 산도'를 찾는 소매상들에게 경쟁회사 제품을 권하는 거야.열 받았죠.때마침 코카콜라가 자동차에 싣고 '루트 세일'이란 걸 하고 있었는데 그게 눈에 들어왔어요. 대학 졸업생 몇 명을 뽑아서 전주로 내려갔지.전주가 실험하기 좋은 독립상권이었거든.창도 닦고 짐도 날라주고 무조건 소매상이 원하는 것은 다 해줬더니 조금씩 반응이 오더군요. 전주에서 노하우를 얻어 서울에서도 직판체제를 갖추기 시작했죠.1976년에 상장을 한 것도 루트 세일을 위해서는 돈이 많이 필요해서였지요."

-그때 영업체계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거네요.

"그렇지.직영으로 바꾸면서 도매상이 사라졌거든.우리가 시스템을 바꾼 덕분에 외국 과자가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던 겁니다. 입사할 때만 해도 회사 매출이 20억원쯤이었는데 상장 이후에 100억원대로 성장했지.그때 해태제과는 2000억원대 매출의 회사였고."

-2세 경영에 대해선 어떤 생각이세요.

"나야 뭐 2세이긴 한데 부도 내고 들어엎고….다른 분들하곤 좀 다릅니다. (웃음) 중요한 것은 2세냐 아니냐가 아니잖아요."

-중간에 크라운제과를 벗어나 외도를 하셨는데.

"25년 전 나가서 10년 전에 들어왔어요. 15년 동안 방황한 거죠.6남매 중에서 선친이 내 (남)동생들과 경영을 해 보고 싶어하시더라고.그래서 인천에다 자동포장기계 공장을 차렸어요. 내가 원래 기계를 좋아해서 직접 개발한 것도 꽤 있었는데 그게 아까웠거든요.한다고 하긴 했는데 잘 안됐어요.나중에 자동차부품 공장도 해 보고 주물 공장도 했습니다.그러다가 1995년에 아버지가 부르셔서 회사로 복귀했습니다.인천 공장은 다 처분했고요."

-인천 시절이 순탄치만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도 어려워서 목 매달 생각도 해 보고,한강 다리에도 몇 번 올라갔습니다.한때는 '종으로라도 나를 팔면 얼마나 받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니까요."

# 크라운 대표 취임과 문화 강(强)기업론

-대표로 취임한 후 가장 신경 쓰신 일은.

"사라진 꿈을 되찾는 게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했어요.예전에 과자는 곧 꿈이었거든.그런데 지금은 그게 사라졌어요.기업들의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 큽니다.과자는 기호 상품이니까 '맛있게만 만들면 안 먹고 배기냐'는 배짱으로 과자를 팔았습니다."

-그래서 감성 경영론을 펼치게 되신 것이로군요.

"먼저 회사에 문화를 심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매주 등산 가서 정상에서 시 읊고 유머 한 가지씩 돌아가면서 얘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특히 유머는 스트레스 많은 점주 만날 때 영업 사원들이 지녀야 할 필수품입니다. 재미 많이 봤어요."

-지금 감성 경영할 때냐는 비판도 있습니다.

"고객한테 아름다움,심미적인 것을 제공하려면 우리가 먼저 그걸 알아야죠.삼성그룹을 한 번 보세요. 선대 회장 이후에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문화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호암아트홀,리움미술관 같은 것을 운영하면서 직원들에게 문화를 심어 줬잖아요. '쪼인트 까고' 윽박지르는 기업 문화가 얼마나 가겠습니까. 예전엔 덩치 큰 기업이 작은 기업을 집어삼켰다면 앞으로는 속도(기술),더 나아가 기업 문화 수준이 높은 회사가 제일 앞선 기업이 될 겁니다."

-팀장급 이상에게는 최신형 IT(정보기술) 제품을 지급한다는데.

"지금까지 얘기한 것과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얼리 어답터(early adapter·최신 제품을 항상 남보다 먼저 구입해서 써 보는 마니아)'가 돼야 문화는 물론이고 세상 돌아가는 걸 아는 법입니다. 무조건 신형이 나오면 임원들에게 쓰게 만듭니다. (동석했던 해태제과 강경수 이사를 쳐다보며) 우리 임원들은 고생 좀 해야 돼."(윤 회장은 자신의 최신형 PDA 폰을 시연해 보기도 하고,뒷주머니에서 디카를 꺼내 최근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PDA폰용 스틱 대신 크레딧 카드를 잘라 만든 자신만의 스틱을 자랑하기도 했다.)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 찍는 것은 언제부터 취미로 가지셨습니까.

"언제부터랄 거는 없고 수많은 일들을 모두 기억할 수 없으니까 무조건 찍어 두는 거지.쇼케이스,음악회,아름다운 장면은 모두 찍어 둬요.아직도 찍고 싶은 곳은 많은데 특히 에베레스트 산에 꼭 가고 싶어요.의사가 건강상 만류하니까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세상엔 찍어야 할 게 참 많더라고요."

-과자 산업의 미래는 어떻습니까.

"꿈을 주는 산업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미래는 밝습니다.고객들에게 봉사하면 가능한 일이죠.한마디로 고객이 도망 가지 못하게 고객과 소통하는 거를 말합니다.도망 가지 못할 뿐더러 팔을 안으로 굽게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하루아침에 되겠습니까만은 직원들이 점차 역량을 갖춰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루에 과자는 얼마나 드세요?

"너무 많이 먹어서 배만 나왔어요.한 봉을 다 먹고 난 다음에 두 봉째 먹는 맛이 과자의 진짜 맛이거든요.이 때도 맛이 있어야 소비자들에게 구매 욕구를 자극할 수 있습니다.직업병인 것 같아서 아예 우리 연구소 직원들에게 많이 먹어도 탄수화물 흡수가 덜한 제품을 만들라고 했는데 아직 성과는 별로예요.(웃음)"

# 인재론

-조직에서 필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구분합니까.

"제가 나름대로 머리를 짜내서 만든 '구궁 인재론(九宮人財論)'이 있습니다. 이걸 보고 직원들을 평가합니다.수(修),학(學),사(思),열(熱),충(忠),신(信),구(究),조(造),수(首) 9개를 직원들이 갖췄으면 하는 것이지요.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충(忠)은 충성을 의미해요.신(信)은 믿음으로 말을 지키는 게 믿음이라는 뜻입니다.조(造)는 하늘에 바치는 물건을 만든다는 의미죠.이 밖에 수(修)는 자신을 닦고 정돈하라는 것을,열(熱)은 열정을 뜻합니다.구(究)는 연구,수(首)는 무리 중에 뛰어나서 멀리 내다보는 판단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요."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게 뭡니까.

"충이지요. 기능이나 기술 능력도 중요하지만 충이 제일 중요합니다. 기술이 있어도 (조직에) 충성을 바치지 않으면 칼날을 잡는 것과 같게 될 수도 있죠.좋은 조직은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 많아야 만들어집니다. 모든 것을 다 아웃소싱할 수 있어도 충(忠)만은 아웃소싱할 수 없습니다."

정리=박동휘 박신영 기자ㆍ사진=김영우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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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명은

목계(木鷄)를 닮자는 겁니다. 사무실에 목계를 걸어 놓고 생각날 때마다 바라봅니다. 장자에 나오는 기성자라는 사람은 싸움을 하지 않더라도 근엄한 위용을 갖춰 어떤 싸움닭도 범접하지 못하는 게 나무닭이라고 했습니다. 목계와 같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많은 내공을 쌓아야 합니다. 부하들이 알아서 자율적으로 따라오게 만들고 싶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아이디어란

다른 사람들이 무심코 툭툭 던지는 얘기를 조금 바꿔서 내 것으로 만듭니다. 예컨대 등산할 때,탁 트인 곳에 있으니까 직급에 관계 없이 자연스럽게 좋은 얘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말 속에서 진정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골방에서 쥐어 짠다고 쉽게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간혹 황당한 얘기들 가운데서 아이디어를 건져내기도 합니다.▶구름다리론(論)

안양 신사옥 앞에 구름다리를 만들고 있어요. 다리가 네 개인데 왼쪽으로 갈수록 난이도가 높게 만들었죠.처음엔 누구나 오른쪽에 있는 쉬운 다리로 갑니다. 나중엔 모든 사람이 맨 왼쪽에서 도전을 즐기고 있게 된다 이겁니다. '무서운 것이 재미있다'는 얘기가 있어요. 도전(challenge)과 재미(fun)는 일맥상통한다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