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플라자] 기부문화, 새로운 관계맺기

權五甲 <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

최근 카이스트(KAIST)는 졸업식에서 1971년 설립 이래 처음으로 네 사람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은 정문술 전 미래산업 대표,이종문 암벡스 벤처그룹 대표,네일 파파라도 미 메디테크 회장,박병준 미 베리타스 CPS 특별자문위원이다. 이들은 카이스트에 기부 등을 통해 많은 기여를 해 이번에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자신이 형성한 재산을 이웃과 나누는 기부는 그 기원(起源)이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의미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스와 로마의 귀족들은 자신의 신분에 따른 특권을 누렸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스스로 전장(戰場)의 선봉에 서서 용감하게 적과 싸웠고,이러한 정신은 중세 유럽의 귀족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미국에서는 귀족의 개념이 시민으로 보다 확대돼 활발한 기부문화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기부문화 발전에는 이 같은 정신적 유산과 함께 기부문화를 촉발시킨 훌륭한 사회적 인물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카네기,록펠러,포드 등 산업자본의 부(富)를 형성한 재벌들이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공익활동에 앞장섬으로써 사회지도층의 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으며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미국의 활발한 기부문화를 형성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최근에는 워런 버핏이 약 310억달러에 해당하는 주식을 사회에 환원한 바 있으며,특히 그는 자신이 설립한 재단이 있음에도 빌 게이츠가 운영하고 있는 '빌 앤 멜린다 게이츠재단'에 기부했다. 빌 게이츠가 훌륭한 사업가인 만큼 빌 게이츠가 운영하는 재단에 기부하면 자신의 기부가 사회적으로 훌륭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우리나라에서의 기부문화는 이제 막 걸음마 단계를 지나 성장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과거 우리의 기부문화는 기업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고 그나마 일부 준조세(準租稅)의 성격을 지니기도 했지만 이제는 건전한 기부문화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최근 국세청의 발표를 보면 기업이 낸 기부금은 2006년에 2조4702억원으로 2005년에 비해 14.4% 증가한 반면 기업의 접대비는 2005년에 비해 오히려 5% 감소해 기업의 기부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학문과 존경의 상징으로 추앙받던 대학 총장들이 상아탑(象牙塔)에서 나와 수천억원의 대학기금을 형성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등 또 다른 기부문화를 다져가고 있다. 이러한 대규모의 기부와 함께 일반인에 의한 기부문화도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다. 2000년에 설립된 '아름다운 재단'의 '1% 나눔'운동은 기부라는 나눔의 행동이 기업이나 부유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행동이며 나눔을 통해 우리 스스로 더 행복해지고 우리 사회가 더욱 살기 좋은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일반인에 의한 기부문화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막 꽃피우기 시작한 이러한 기부문화를 더욱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의 제도적인 정비도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기부금에 대해 개인의 경우 소득의 10%,그리고 기업의 경우 5%까지 소득을 감면해 주는 데 비해 미국은 개인의 경우 50%,기업의 경우 10%까지 소득을 감면해 준다고 한다. 그만큼 기부를 유도(誘導)하기 위한 제도가 정비돼 있으며,특히 개인의 경우에 더 큰 비율을 적용함으로써 개인의 기부를 보다 장려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기부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나눔의 공감대가 확산돼야 하겠지만 이와 함께 제도를 정비해 기부문화가 사회적으로 정착되고 활성화되도록 이끌 필요가 있다.

흔히 선진국인지의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 중 하나가 기부문화의 수준이라 할 만큼 기부는 이웃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이자 동시에 성숙된 시민의식의 지표다. 우리가 딱히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 나눔의 정신이 널리 퍼져 나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