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386친구들 정치만 생각하며 살아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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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성장률이 4%대로 고착화하고,기업들의 성장이 정체하는 등 우리나라 경제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는 걱정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최근 '샌드위치론(일본과 중국에 낀 상황)'에 이어 '5~6년 후 큰 혼란을 겪을 수 있다'는 진단을 내놓으면서 위기 체감지수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이 같은 현재의 경제 상황을 경제개발 주역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근대화 과정에서 경제개발을 이끌며 '한국 철강산업의 아버지'로 불린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80)을 만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특히 그가 40년간 몸담아온 포스코가 세계적인 통합·대형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대적 인수·합병(M&A)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어 박 명예회장의 조언은 절실한 상황이다.봄기운이 완연한 지난 13일 오후.박 명예회장은 부인 정옥자씨(76)와 함께 서울 중구 회현동 조지훈 시비(詩碑)에서 장충동 국립극장까지 약 3km에 달하는 남산순환도로를 산책하면서 본지와 인터뷰를 했다.
박 명예회장은 6년 전 폐를 압박하던 3.2kg짜리 물혹을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은 적도 있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건강한 모습이었다.
물론 세월의 흐름은 '철강왕'도 비켜 가지는 않았다.트레이드 마크인 짙은 눈썹에는 어느덧 흰서리가 내려 있었고,목도리와 장갑으로 초봄의 공기를 막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경제와 철강산업에 대해 언급할 때는 40년 전 포항의 모래밭에서 제철소를 지을 때의 패기와 열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또렷했다.그는 요즘도 국가의 장래와 관련한 정치 경제 등의 현안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다급한 마음에 처음부터 우리 경제의 현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느냐고 물었다.
박 명예회장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걷기만 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지만 자제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최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5~6년 후 삼성과 한국 경제가 혼란스러워질 것'이라고 말했던 신문기사를 보셨느냐"고 질문하자 박 명예회장은 "며칠 전 이 회장이 한 그 얘기 말이지? 나도 봤어.지금 우리 경제 위태위태해 보이지"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이 회장이 반도체 휴대폰 조선 철강 등 현재 우리 경제를 이끌고 있는 주력 산업을 이어갈 신(新)성장 산업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 같다'는 해석에 대해서도 "그것도 그렇지"라고 동의했다.
박 명예회장은 다시 침묵하면서 얼마간 걸었다.
그런 뒤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어.지금도 그렇고.하지만 예전에 그랬듯이 잘 헤쳐 나갈 거야.난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우리 경제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상황 인식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고 싶다는 의중으로 읽혔다.
맨땅에서,맨손으로 포스코 신화를 일궈낸 불굴의 의지를 상기시켜 주는 듯했다.
화제는 정치 쪽으로 넘어갔다.
현재 정치 상황을 묻자 그는 대뜸 이른바 '386 세대'에 대한 얘기를 했다.
"386 친구들은 젊을 때부터 정치를 생각하고 지켜보고 살아 왔지.그래서 그런지 참 말들을 잘해.우리는 그 나이 때 공장 세우고 현장에서 땀흘리며 살았어.오로지 (허허벌판에 제철소를 짓는 사명을) 해내 보이고 말겠다는 일념밖에 없었지.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신경쓸 시간조차 없었다고.지금 젊은 친구들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산업화를 위해 일생을 바쳤던 선배들의 입장을 좀 더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다소 무거운 주제를 벗어나 철강산업으로 화제를 돌리자 그의 답변은 물론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그의 말 한마디,한마디에는 포스코에 대한 강한 애정이 배어 있었다.
최근 철강업계의 최대 화두인 포스코의 적대적 M&A 가능성에 대한 대응책을 묻자 "기자 양반이 생각하는 대책은 뭐요?"라고 반문한 뒤 "단기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을 모두 갖고 대비해야 해"라고 답했다.
이어 "단기적으로는 해외 우호 지분을 늘려 적대적 M&A를 방어해야 할 것이고,장기적으로는 기업 가치를 올리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해법을 제시했다.
최근 포스코가 신일본제철과 전략적 제휴를 확대한 것에 대해서는 "좋은 관계지.해외에서도 친구를 많이 만들어야지"라고 말했다.
박 명예회장은 "현대차그룹의 현대제철이 포스코와 같은 일관제철소(고로) 건설을 진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경쟁은 좋은 것 아니냐"며 "(경쟁 상황이) 만만치 않은 만큼 잘하길 바란다"고 현대제철의 분발과 성공을 기원했다.
"현대제철은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보지만 그래도 사업을 잘해야 할 거야.선발 업체의 원가경쟁력을 따라잡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특히 포스코는 세계에서 경쟁력이 가장 뛰어난 제철소야.지금 한국에 일관제철소가 또 하나 건설된다고 하니 일본 제철소들이 바짝 긴장하면서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어.현대제철은 포스코는 물론 일본이나 유럽의 세계적인 제철소와 경쟁하려면 정말 잘해야 해."
박 명예회장은 근황에 대해 "해외에 나갈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네 번은 사무실(서울 광화문 파이낸스 빌딩)에 나가.
거기서 이 사람,저 사람 아는 사람들 만나고 있지.이렇게 날씨가 좋으면 산책도 나오고 하지"라고 소개했다.
작년 연말에 박 명예회장은 1970년대 포스코를 무대로 삼았던 인기 TV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에 출연했던 탤런트 황정순 장민호 태현실 윤소정씨 등 연기자와 PD 등을 30여년 만에 서울 포스코센터로 불러 만찬을 함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 명예회장은 "(빙그레 웃으며)아,그 사람들(만찬 참석자들)이 나한테 밥 사 달라고 하도 졸라서,그래서 만나게 됐어.아무튼 그렇게라도 만나니 참 좋더라"며 활짝 웃었다.
그는 "국가와 후학들을 위해 가끔 언론 매체에 글도 쓰고 강연도 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라고 묻자 "에이.이 나이에…나서기가 그렇잖아"라고 사양했다.
박 명예회장은 요즘도 한 달에 한두 차례는 포항이나 광양제철소를 방문한다고 했다."광양제철소는 갯벌을 메워 만든 제철소인데도 세계에서 제일 잘 지은 제철소야.난 지금도 광양제철소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고 있어.그런데 요즘 가서 봐도 '이 설비는 여기 말고 저기에 놨어야 하는 건데'라고 후회하는 게 단 하나도 없을 정도로 (광양제철소는) 완벽해."
글=정구학/이상열 기자 mustafa@hankyung.com
사진=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특히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최근 '샌드위치론(일본과 중국에 낀 상황)'에 이어 '5~6년 후 큰 혼란을 겪을 수 있다'는 진단을 내놓으면서 위기 체감지수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이 같은 현재의 경제 상황을 경제개발 주역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근대화 과정에서 경제개발을 이끌며 '한국 철강산업의 아버지'로 불린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80)을 만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특히 그가 40년간 몸담아온 포스코가 세계적인 통합·대형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대적 인수·합병(M&A)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어 박 명예회장의 조언은 절실한 상황이다.봄기운이 완연한 지난 13일 오후.박 명예회장은 부인 정옥자씨(76)와 함께 서울 중구 회현동 조지훈 시비(詩碑)에서 장충동 국립극장까지 약 3km에 달하는 남산순환도로를 산책하면서 본지와 인터뷰를 했다.
박 명예회장은 6년 전 폐를 압박하던 3.2kg짜리 물혹을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은 적도 있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건강한 모습이었다.
물론 세월의 흐름은 '철강왕'도 비켜 가지는 않았다.트레이드 마크인 짙은 눈썹에는 어느덧 흰서리가 내려 있었고,목도리와 장갑으로 초봄의 공기를 막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경제와 철강산업에 대해 언급할 때는 40년 전 포항의 모래밭에서 제철소를 지을 때의 패기와 열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또렷했다.그는 요즘도 국가의 장래와 관련한 정치 경제 등의 현안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다급한 마음에 처음부터 우리 경제의 현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느냐고 물었다.
박 명예회장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걷기만 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지만 자제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최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5~6년 후 삼성과 한국 경제가 혼란스러워질 것'이라고 말했던 신문기사를 보셨느냐"고 질문하자 박 명예회장은 "며칠 전 이 회장이 한 그 얘기 말이지? 나도 봤어.지금 우리 경제 위태위태해 보이지"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이 회장이 반도체 휴대폰 조선 철강 등 현재 우리 경제를 이끌고 있는 주력 산업을 이어갈 신(新)성장 산업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 같다'는 해석에 대해서도 "그것도 그렇지"라고 동의했다.
박 명예회장은 다시 침묵하면서 얼마간 걸었다.
그런 뒤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어.지금도 그렇고.하지만 예전에 그랬듯이 잘 헤쳐 나갈 거야.난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우리 경제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상황 인식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고 싶다는 의중으로 읽혔다.
맨땅에서,맨손으로 포스코 신화를 일궈낸 불굴의 의지를 상기시켜 주는 듯했다.
화제는 정치 쪽으로 넘어갔다.
현재 정치 상황을 묻자 그는 대뜸 이른바 '386 세대'에 대한 얘기를 했다.
"386 친구들은 젊을 때부터 정치를 생각하고 지켜보고 살아 왔지.그래서 그런지 참 말들을 잘해.우리는 그 나이 때 공장 세우고 현장에서 땀흘리며 살았어.오로지 (허허벌판에 제철소를 짓는 사명을) 해내 보이고 말겠다는 일념밖에 없었지.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신경쓸 시간조차 없었다고.지금 젊은 친구들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산업화를 위해 일생을 바쳤던 선배들의 입장을 좀 더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다소 무거운 주제를 벗어나 철강산업으로 화제를 돌리자 그의 답변은 물론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그의 말 한마디,한마디에는 포스코에 대한 강한 애정이 배어 있었다.
최근 철강업계의 최대 화두인 포스코의 적대적 M&A 가능성에 대한 대응책을 묻자 "기자 양반이 생각하는 대책은 뭐요?"라고 반문한 뒤 "단기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을 모두 갖고 대비해야 해"라고 답했다.
이어 "단기적으로는 해외 우호 지분을 늘려 적대적 M&A를 방어해야 할 것이고,장기적으로는 기업 가치를 올리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해법을 제시했다.
최근 포스코가 신일본제철과 전략적 제휴를 확대한 것에 대해서는 "좋은 관계지.해외에서도 친구를 많이 만들어야지"라고 말했다.
박 명예회장은 "현대차그룹의 현대제철이 포스코와 같은 일관제철소(고로) 건설을 진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경쟁은 좋은 것 아니냐"며 "(경쟁 상황이) 만만치 않은 만큼 잘하길 바란다"고 현대제철의 분발과 성공을 기원했다.
"현대제철은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보지만 그래도 사업을 잘해야 할 거야.선발 업체의 원가경쟁력을 따라잡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특히 포스코는 세계에서 경쟁력이 가장 뛰어난 제철소야.지금 한국에 일관제철소가 또 하나 건설된다고 하니 일본 제철소들이 바짝 긴장하면서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어.현대제철은 포스코는 물론 일본이나 유럽의 세계적인 제철소와 경쟁하려면 정말 잘해야 해."
박 명예회장은 근황에 대해 "해외에 나갈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네 번은 사무실(서울 광화문 파이낸스 빌딩)에 나가.
거기서 이 사람,저 사람 아는 사람들 만나고 있지.이렇게 날씨가 좋으면 산책도 나오고 하지"라고 소개했다.
작년 연말에 박 명예회장은 1970년대 포스코를 무대로 삼았던 인기 TV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에 출연했던 탤런트 황정순 장민호 태현실 윤소정씨 등 연기자와 PD 등을 30여년 만에 서울 포스코센터로 불러 만찬을 함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 명예회장은 "(빙그레 웃으며)아,그 사람들(만찬 참석자들)이 나한테 밥 사 달라고 하도 졸라서,그래서 만나게 됐어.아무튼 그렇게라도 만나니 참 좋더라"며 활짝 웃었다.
그는 "국가와 후학들을 위해 가끔 언론 매체에 글도 쓰고 강연도 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라고 묻자 "에이.이 나이에…나서기가 그렇잖아"라고 사양했다.
박 명예회장은 요즘도 한 달에 한두 차례는 포항이나 광양제철소를 방문한다고 했다."광양제철소는 갯벌을 메워 만든 제철소인데도 세계에서 제일 잘 지은 제철소야.난 지금도 광양제철소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고 있어.그런데 요즘 가서 봐도 '이 설비는 여기 말고 저기에 놨어야 하는 건데'라고 후회하는 게 단 하나도 없을 정도로 (광양제철소는) 완벽해."
글=정구학/이상열 기자 mustafa@hankyung.com
사진=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