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ㆍ고조선은 요서에 있었다" ‥ 심백강 박사, '황하에서 한라까지'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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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중국 요서지방의 난하와 대릉하 유역에 있었으며 이곳이 고조선의 발상지였다."
중국 '동북공정'의 허구를 밝히는 학계의 연구 성과들이 잇따르는 가운데 한국 고대사 쟁점으로 남아있는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역사학자인 심백강 박사(51·민족문화연구원장)가 이 같은 주장을 제기했다.20일 발간한 저서 '황하에서 한라까지'(참좋은세상)를 통해서다.
그는 이 책에서 청나라 때 간행된 '사고전서' 등 중국의 각종 사료들을 토대로 사학계의 통설인 '대동강 낙랑설'을 반박하면서 고조선과 삼국의 영토를 한반도로 국한시키는 '반도사관' 폐기를 주창한다.
심 박사가 랴오닝성(遼寧省)과 허베이성(河北省)의 접경지대인 난하와 대릉하 유역에 있었다고 보는 이유는 8가지.'한서 지리지''수서 지리지''사기 고제본기''노룡새략' 등 옛 사료의 관련 기록과 중국사회과학원이 펴낸 '중국역사지도집' 등이 근거다.그 중에서도 결정적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낙랑'이라는 이름의 유래다.
난하 부근에는 난현·난남·난평 등의 지명이 있고,요하 주변에는 요동·요서·요양 등의 관련 지명이 있는 것처럼 고대 사회의 지명은 산이나 강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지만 대동강 유역에서는 낙랑과 관련된 산이나 강이 없다는 것.반면 대릉하 유역에는 요락수(饒樂水)와 백랑수(白狼水)가 있었고 두 강의 이름에서 낙랑이라는 이름을 따왔다는 얘기다.
현재 시라무렌허(西拉木倫河)로 불리는 서요하 상류의 한나라 때 이름이 요락수였으며 그 아래쪽의 현재 대릉하가 백랑수였다는 설명이다.따라서 낙랑군은 현재의 대릉하 유역을 중심으로 요하 서쪽과 난하 동쪽 일대에 있었다고 그는 추정한다.
'중국역사지도집' 제2책의 '서한과 동한시기 전도'를 보면 요하 부근에 요서군,난하 부근에 우북평군이 있고 대릉하 유역은 빈 곳으로 돼있는데 이곳이 낙랑군이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심 박사는 따라서 대릉하 유역이 고조선의 발상지라며 문헌학·고고학·민족 이동경로·지명 등의 근거를 제시한다.예컨대 위만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王儉城)을 '사기 조선열전'에서는 '왕험(王險)에 도듭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요동군 험독현(險瀆縣)'이 바로 이곳이며 여러 사료를 비정하면 오늘날 대릉하 일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대릉하 유역에서 건국된 고조선이 점차 동쪽으로 밀려나면서 요동을 거쳐 평양까지 이동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또한 요서지방의 대릉하 일대에서 중원의 황하문명에 앞선 홍산문화를 꽃피운 주체가 한민족이었고,북경원인은 한족의 조상이 아니라 동이족의 조상이었으며 베이징은 동이족의 활동무대였으며,요하문명권의 주역이 한민족이었다는 주장은 기존의 역사 인식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중국 '동북공정'의 허구를 밝히는 학계의 연구 성과들이 잇따르는 가운데 한국 고대사 쟁점으로 남아있는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역사학자인 심백강 박사(51·민족문화연구원장)가 이 같은 주장을 제기했다.20일 발간한 저서 '황하에서 한라까지'(참좋은세상)를 통해서다.
그는 이 책에서 청나라 때 간행된 '사고전서' 등 중국의 각종 사료들을 토대로 사학계의 통설인 '대동강 낙랑설'을 반박하면서 고조선과 삼국의 영토를 한반도로 국한시키는 '반도사관' 폐기를 주창한다.
심 박사가 랴오닝성(遼寧省)과 허베이성(河北省)의 접경지대인 난하와 대릉하 유역에 있었다고 보는 이유는 8가지.'한서 지리지''수서 지리지''사기 고제본기''노룡새략' 등 옛 사료의 관련 기록과 중국사회과학원이 펴낸 '중국역사지도집' 등이 근거다.그 중에서도 결정적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낙랑'이라는 이름의 유래다.
난하 부근에는 난현·난남·난평 등의 지명이 있고,요하 주변에는 요동·요서·요양 등의 관련 지명이 있는 것처럼 고대 사회의 지명은 산이나 강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지만 대동강 유역에서는 낙랑과 관련된 산이나 강이 없다는 것.반면 대릉하 유역에는 요락수(饒樂水)와 백랑수(白狼水)가 있었고 두 강의 이름에서 낙랑이라는 이름을 따왔다는 얘기다.
현재 시라무렌허(西拉木倫河)로 불리는 서요하 상류의 한나라 때 이름이 요락수였으며 그 아래쪽의 현재 대릉하가 백랑수였다는 설명이다.따라서 낙랑군은 현재의 대릉하 유역을 중심으로 요하 서쪽과 난하 동쪽 일대에 있었다고 그는 추정한다.
'중국역사지도집' 제2책의 '서한과 동한시기 전도'를 보면 요하 부근에 요서군,난하 부근에 우북평군이 있고 대릉하 유역은 빈 곳으로 돼있는데 이곳이 낙랑군이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심 박사는 따라서 대릉하 유역이 고조선의 발상지라며 문헌학·고고학·민족 이동경로·지명 등의 근거를 제시한다.예컨대 위만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王儉城)을 '사기 조선열전'에서는 '왕험(王險)에 도듭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요동군 험독현(險瀆縣)'이 바로 이곳이며 여러 사료를 비정하면 오늘날 대릉하 일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대릉하 유역에서 건국된 고조선이 점차 동쪽으로 밀려나면서 요동을 거쳐 평양까지 이동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또한 요서지방의 대릉하 일대에서 중원의 황하문명에 앞선 홍산문화를 꽃피운 주체가 한민족이었고,북경원인은 한족의 조상이 아니라 동이족의 조상이었으며 베이징은 동이족의 활동무대였으며,요하문명권의 주역이 한민족이었다는 주장은 기존의 역사 인식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