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중세 놀이

우리 모두 꿈꾼다.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면서 적들을 무찔렀으면.천하장사로 만들어주는 '마스크'를 얻어쓰고 조폭과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으면.어린 왕자처럼 낯선 별에서 여우와 얘기도 나눠봤으면.잠깐이라도 좋으니 영웅이나 신화의 주인공이 돼 초라하고 뻔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이다.가장행렬 가면무도회 핼러윈파티 등도 어쩌면 그런 소망에서 생겨났을지 모른다.

국내에선 요즘 '코스프레'가 유행이다.

코스프레는 복장(costume)과 놀이(play)를 합친 '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의 줄임말.만화나 게임 캐릭터 혹은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과 똑같이 차려입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1980년대 초 일본에서 생겨나 국내엔 90년대 중반 소개됐다는데 최근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일본엔 전문모델이 많고 관련물품 판매회사도 번창한다고 한다.

국내에도 수많은 인터넷 동호회가 있고 전국 콘테스트도 열린다.가수 이승환씨는 얼마 전 '백혈병 어린이 돕기 공연'을 열면서 관객의 드레스 코드로 '엽기발랄'을 제시하기도 했다.

건장한 남성이 요술공주 세리처럼 차려입거나 젊은 여성이 꽃무늬 몸뻬바지에 아줌마 파마를 했거나 남녀 한쌍이 스케이팅복과 수영복을 입고 오면 점수를 준다는 식이다.

코스프레는 이처럼 평소의 자신과 전혀 다른 모습과 태도로 스트레스를 풀고 자기표출 욕구도 충족시키는 행위다.일본발 코스프레가 세계로 퍼지는 가운데 벨기에에선 중세놀이가 한창이라고 한다.

주말이면 옛건물에 모여 갑옷같은 걸 입고 당시 유럽엔 없던 커피를 마시지 않는 등 중세인처럼 산다는 것이다.

각계각층 사람이 참여한다는 걸 보면 없는 게 없는 현대생활이 행복한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중세놀이와 코스프레는 일종의 역할극이다.

변신을 통해 누추한 현실을 견딜 힘을 얻는다면 나쁠 것 없다.

단 놀이란 중독성을 지닌다. 지나치게 빠져 현실과 극을 혼동하는 건 곤란하다.

중요한 사실 하나.

코스프레는 만화산업의 파생상품이다.일본색이 짙다고 탓하기보다 우리 창작 콘텐츠 활성화를 도울 일이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