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밀이 샌다] (1)적은 내부에 있다...제자까지 동원해 일급비밀 빼돌려

광통신 부품제조 업체 P사의 대표를 지냈던 이모씨(B대 전 교수)가 2003년 초 호주인 K모씨와 함께 호주에 L사를 설립할 때만 해도 주변에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나 보다'라고 여겼다.

그러나 L사 설립은 3년에 걸쳐 진행된 산업 스파이 활동의 서막에 불과했다.호주의 L사는 광통신 부품을 제조하는 P사의 동종 업체.

이씨는 L사에 광통신 핵심부품 제조기술 제공의 대가로 연봉 10만 달러 지급,연구소장 대우 등의 내용이 포함된 고용계약도 체결했다.

한번 기술을 빼돌리기로 결심한 뒤 그의 행보는 더욱 대담해졌다.이씨는 당시 재직하던 B대에 호주 A대학 교환교수 근무를 신청해 출국했고 L사의 연구소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기술 유출 감행엔 제자들도 동원했다.

이씨는 P사 연구원으로 근무중이던 제자 2명을 사주,노트북 CD 메모리스틱 등에 이 회사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3GB 용량의 첨단 광통신 부품 양산기술자료를 복사해 반출토록 했던 것.이씨는 결국 첩보를 입수한 국정원에 덜미를 잡혔고 검찰에 체포됐다.교수로서의 명예도 한 순간에 날아가고 말았다.

P사 직원들은 "불만을 품고 나갔다곤 하지만 전직 사장이 설마…"라며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어제까지 옆자리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가 오늘은 회사의 '대들보'를 송두리째 허물어 뜨릴 수 있는 산업스파이로 돌변하고 있다.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가 2003∼2006년 적발한 92건의 해외 불법기술유출 사건의 유출자를 신분별로 분석한 결과 85%(79건)가 전·현직 직원,즉 내부자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79건 가운데 71건은 회사의 핵심 기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전·현직 연구원들이었다.

유출 동기는 경쟁사의 금전적인 유혹이나 창업 등 개인적 영리를 목적으로 한 사례가 전체의 70%(64건)을 차지했다.

처우·인사 불만에 의한 기술유출도 19%(18건)에 달했다.

특히 최근엔 중국 미국 일본 등 외국 기업이 국내 헤드헌터 회사에 의뢰해 기술을 빼내올 '적임자'를 물색하는 사례도 빈발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국내 주요 기업 보안 담당자들은 처우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직원은 물론 해외에 자주 오가거나 갑자기 퇴직하는 직원들을 은밀히 파악,요주의 대상으로 분류해 놓고 있다.

기밀을 빼돌리려다 적발된 직원들 중엔 '그럴 만했던 사람'으로 치부되는 불만 쌓인 내부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쟁업체로 전직하면서 회사 기밀을 유출하려다 적발돼 지난 2월 대법원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의 확정 판결은 받은 D그룹 전직 연구원 H씨는 사내에서도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는 2005년 8월 퇴사 직전 휴일에 출근,LCD 컬러필터 관련 기술이 포함된 80여개의 파일을 외부 메일로 전송한 것이 추후 내부 감사를 통해 드러나 기소됐다.

"전공을 살려 일본 기업에서 일하려고 한다"는 그의 말을 믿었던 동료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동종 업계인 미국 L사에 취업한 것으로 밝혀진 것.H씨는 퇴사 후 얼마 뒤엔 천안의 한 PC방에서 동료의 ID를 도용,추가로 파일을 빼내기도 했다.

회사 관계자는 400억원을 투자한 기술이 송두리째 넘어갔더라면 5년간 1조원에 가까운 매출 손실이 발생했을 것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문가들은 "내부 보안교육은 물론 보안시스템 구축을 통해 사전에 내부로부터의 위험을 방지하는 노력이 절실하다"며 "무엇보다 신기술을 개발한 연구원 등에 파격적인 보상책을 제공하는 시스템 마련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국정원 관계자는 "특히 대학이나 국책연구소엔 '지식은 공유하는 것'이란 인식이 퍼져 있어 보안 수준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면서 "학생 때부터 보안의식과 직업윤리를 확립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획취재부=김수언/주용석/류시훈 기자 indept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