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미국이 낳은 비극이다

버지니아공대 참사에 대한 반응이 나라마다 다르다.

한국은 정신파탄자 조승희씨의 광기를 국가적·인종적 차원에서 속죄라도 해야 하는 양 죄책감에 시달리는 듯했다. 이민자의 외톨이 아들을 감싸지 못한 미국 학교와 사회의 비통합적 문화를 탓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숨을 죽였다. 미국은 조씨 개인의 정신병력과 분열 증세에 초점을 맞췄다. 주목되는 것은 유럽국가들의 반응이다. 미국의 느슨한 총기규제가 화를 키웠다고 일제히 비판했다. 영국의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지는 표지에 희생자나 버지니아공대 사진 대신 성조기로 덧칠된 권총 한 자루를 달랑 그려놓고 '미국의 비극'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총기남용 풍토가 비극을 낳았다고 꼬집은 것이다.

아무리 미국의 수정헌법 2조가 국민들의 총기 소지 권리를 인정하고 광활한 땅덩어리 한 귀퉁이에 홀로 사는 사람들의 신변 보호를 위한 무장이 필요하다지만 총포상이 곳곳에 널려있고 수시로 총기 쇼가 열리는 것을 이방인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 가정에 깔린 총만 해도 2억4000만자루. 3억명 인구에 그 정도면 성인 수보다 훨씬 많다. 3분의 1은 갖고 다니기 편리한 권총이다. 총을 사는 게 운전면허증 따는 일만큼 쉽다고 한다. 조씨도 한 자루를 인터넷에서 샀다. 증오와 분노가 치밀어오를 때 흉기가 코 앞에 있다면 어떻게 될까. 지난해 미국의 총기사망자가 1만4000명을 넘었다는 사실이 그 결과를 말해준다. 총기 자살까지 합하면 희생자는 3만명을 훌쩍 넘는다. 전쟁 중인 나라를 빼고는 거의 전세계 최악의 총기 사망률이다.

1999년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뜨린 콜로라도주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은 조씨 사건보다 지독했다. 사망자가 15명으로 버지니아공대 희생자보다 적었지만 3학년생 2명이 1년 전부터 범행을 치밀하게 계획했고 무려 900여발을 난사했다. 그런데도 총기 규제를 강화한 '살상무기소유금지법'은 2004년 연장이 안 돼 휴지통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법을 제안했던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총기옹호론자들의 반발에 밀려 하원 다수당을 공화당에 내줘야 했다. 같은 당 앨 고어 부통령도 대선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졌다.

그만큼 총기옹호론자들의 입김이 거세다. 대표적인 로비단체인 전미총기협회(NRA)는 회원만 해도 430만명,그들이 최근 10년간 낸 정치자금은 5000만달러(약 460억원)로 반대편 로비단체의 30배를 훌쩍 넘을 정도로 막강하다. NRA는 주장한다.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총'이 아니라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이고 총이 없다면 더 파괴적인 무기를 동원할 것이라고. 극단적 개인주의와 자유에 바탕을 둔 총기소유 지지자들의 그런 목소리가 워낙 강한 탓에 대선 출마를 선언한 정치인들도 총기 규제를 자신있게 꺼내지 못한다.

한국 사람들이 느낀 집단적 죄책감은 어느 정도 사라졌다. 하지만 장난감 권총을 사듯 살상무기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현실에서 언제 또다른 대형 참사가 터질지 모른다는 우려와 불안감은 유족들의 슬픔만큼이나 오래갈 것 같다. '범죄의 폭풍을 몰고 오는 악마'를 방치한 채 제2,제3의 버지니아공대 참사를 막는다는 것은 연목구어 아닐까.

고광철 국제부장 g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