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확 前국무총리 숙환으로 별세 ... 정ㆍ관ㆍ재계 넘나든 'TK의 대부'
입력
수정
26일 타계한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제1공화국 탄생부터 5공화국 출범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정·관·재계를 넘나들면서 생생하게 목도한 증인이었다.
1979년 12·12 당시 최규하 대통령 대행이 신군부에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을 사후 재가하는 현장을 직접 지켜봤고,1980년 '서울의 봄' 때는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를 가결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등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신 전 총리는 전문 경제관료로 누구보다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만 39세의 나이에 부흥부 장관(경제기획원의 전신)에 오르는 등 여섯 차례에 걸쳐 장·차관을 지냈다.
관가에서 물러난 뒤에는 'TK(대구·경북)의 대부'라는 평가에 걸맞게 정·재계 인사들과 교류를 이어 나갔고 1960년대 말과 1980년대 중반에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로 활동하기도 했다.그의 화려한 인생은 해방 전부터 시작됐다.
1920년 경북 칠곡 출생인 그는 어릴 때부터 경북·대구 지역의 '신동'으로 불렸다.
경북고 전신인 대구고보와 경성제대 법문학부(현재의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현 행정고시)에 합격,한국인 고시 합격자로는 처음으로 일본 도쿄의 상무성에서 근무했다.해방 후 대구대 교수로 3년을 보낸 그는 1951년 상공부 공업국 공정과장으로 임용된 뒤 고속 승진을 거듭한 끝에 1959년 만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부흥부 장관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4·19 혁명이 일어난 뒤 '3·15 부정선거'에 관련됐다는 혐의를 받아 2년여간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재계에 몸을 담았던 그가 다시 관계에 복귀한 것은 공화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 1973년 9대 총선이 계기였다.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1975년 보건사회부 장관을 맡았고 1978년에는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됐다.
10·26 이후 국무총리를 맡은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평가가 엇갈렸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그는 최규하 대통령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개헌 등 정치적 사안에 대한 의사를 표현해 여론의 관심 대상이 됐다.
그가 신군부와 야합했다거나 독자적인 신당을 창당하려 한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한 국무회의를 주재한 뒤 이튿날 사의를 밝히고 물러난 그는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86년에는 삼성물산 회장 직을 맡아 '이건희 회장 체제'의 기반을 닦았고,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인 1988년에는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으로 동력자원부 폐지 등 개혁안을 입안하기도 했다.
그는 또 1999년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아 기념관 건립 추진 등의 활동을 벌였으며 최근에는 박근혜 캠프 원로자문그룹으로도 등록하는 등 말년까지 활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박수진 기자 notwoman@hankyung.com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빈소가 마련됐으며 발인은 30일 오전 10시.(02)2072-2091
1979년 12·12 당시 최규하 대통령 대행이 신군부에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을 사후 재가하는 현장을 직접 지켜봤고,1980년 '서울의 봄' 때는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를 가결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등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신 전 총리는 전문 경제관료로 누구보다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만 39세의 나이에 부흥부 장관(경제기획원의 전신)에 오르는 등 여섯 차례에 걸쳐 장·차관을 지냈다.
관가에서 물러난 뒤에는 'TK(대구·경북)의 대부'라는 평가에 걸맞게 정·재계 인사들과 교류를 이어 나갔고 1960년대 말과 1980년대 중반에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로 활동하기도 했다.그의 화려한 인생은 해방 전부터 시작됐다.
1920년 경북 칠곡 출생인 그는 어릴 때부터 경북·대구 지역의 '신동'으로 불렸다.
경북고 전신인 대구고보와 경성제대 법문학부(현재의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현 행정고시)에 합격,한국인 고시 합격자로는 처음으로 일본 도쿄의 상무성에서 근무했다.해방 후 대구대 교수로 3년을 보낸 그는 1951년 상공부 공업국 공정과장으로 임용된 뒤 고속 승진을 거듭한 끝에 1959년 만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부흥부 장관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4·19 혁명이 일어난 뒤 '3·15 부정선거'에 관련됐다는 혐의를 받아 2년여간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재계에 몸을 담았던 그가 다시 관계에 복귀한 것은 공화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 1973년 9대 총선이 계기였다.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1975년 보건사회부 장관을 맡았고 1978년에는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됐다.
10·26 이후 국무총리를 맡은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평가가 엇갈렸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그는 최규하 대통령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개헌 등 정치적 사안에 대한 의사를 표현해 여론의 관심 대상이 됐다.
그가 신군부와 야합했다거나 독자적인 신당을 창당하려 한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한 국무회의를 주재한 뒤 이튿날 사의를 밝히고 물러난 그는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86년에는 삼성물산 회장 직을 맡아 '이건희 회장 체제'의 기반을 닦았고,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인 1988년에는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으로 동력자원부 폐지 등 개혁안을 입안하기도 했다.
그는 또 1999년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아 기념관 건립 추진 등의 활동을 벌였으며 최근에는 박근혜 캠프 원로자문그룹으로도 등록하는 등 말년까지 활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박수진 기자 notwoman@hankyung.com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빈소가 마련됐으며 발인은 30일 오전 10시.(02)2072-2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