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김옥균 자객과 조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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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래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
113년 전 상하이에서 암살당한 김옥균(金玉均·1851∼1894)의 시체는 여러 부분으로 절단되었다. 그리고 머리에는'大逆不道玉均(대역부도옥균)'이라 쓴 깃발이 붙여져 한강 가에 전시되었고,다른 부분은 팔도의 시장을 끌려 다녔다. 그 기록을 역사 시간에 읽은 40년 전의 미국 학생들은 그 잔혹함에 찔끔했다. 그런 동료 대학원생들 옆에서 나도 처음으로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그런 일은 오래 전 조선왕국의 일이고,더구나 서양 사람들은 중세를 통해 얼마나 잔인한 짓거리를 많이 했더냐고 가볍게 항의했던 기억이다. 그 후 세상은 바뀌어 이제 임금과 왕비는 없고,사람을 죽여 그 시신을 다시 욕보이는 짓은 사라졌다. 인류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인간성에도 진보와 발전이 계속된다고 사람들은 말하기도 한다. 인간의 잔학성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사형제도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처럼,제도적 폭력이 줄어들고 있음은 분명해 보이기도 한다.
이런 세상에서도 끔찍하고 잔혹한 폭거는 그칠 줄을 모른다. 지난달 16일과 18일에 각각 32명의 목숨을 앗아간 미국과 중국의 사고들도 그런 경우다. 4월16일 미국 버지니아주의 어느 대학 교실에서는 학생 조승희가 총을 난사하여 32명을 죽이고,자신도 자살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4월18일 중국의 한 철강 공장에서는 10m 높이에 있던 뜨거운 쇳물 그릇이 떨어져 쇳물 30t이 공장 직원들을 덮쳤다. 하필 버지니아의 희생자와 똑같은 32명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교실의 32명과 공장의 32명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교실의 희생은 가해자가 분명한 폭거였지만,공장의 희생에는 가해자는 없다. 하지만 순식간에 시체조차 완전히 녹아 없어졌다는 공장의 희생이 더 참혹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김옥균이나 그 이전의 수많은 처형당한 사람들의 처지가 미국 교실의 희생자나 중국 공장의 사망자보다 더 잔혹했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의 잔혹성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줄어들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어떤 형태의 폭력이나 잔혹성은 사라져가고 있지만,모양이 다른 폭거는 여전히 인간사회에 감춰져 있음을 보게 된다. 영화를 비롯한 대중매체를 통한 폭력과 잔혹의 표현은 또 다른 모습의 숨겨진 인간이란 생각도 든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만족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는 없다. 1세기 전의 조선왕조와 서양 세계는 전혀 이질적이었고,그래서 김옥균의 시체 전시가 당시의 서양 사람들에게는 참혹하게 느껴졌다. 세계가 점점 지구촌으로 바뀌는 지금 나라와 민족의 경계는 점점 허물어져가고,그와 함께 법률과 도덕의 벽도 낮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인간사회 모두에게 같은 법률과 같은 도덕이 받아들여져 있지는 않다. 또 설령 그런 날이 온다 해도 법과 도덕이 인간의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지난 한 해 동안 전 세계의 테러 공격은 1만4338건으로 2005년에 비해 29%가 증가했다는 최근 보도가 있었다. 미국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테러 증가가 그 원인이지만,문명의 높이는 오히려 인간의 잔혹성을 높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기는 김옥균을 상하이로 유인해 살해한 사람은 김옥균보다 더 '문명개화'(文明開化)한 홍종우(洪鍾宇·1854∼1913)였다. 1888년 일본 조일(朝日:아사히)신문사에서 2년 이상 일하다가 1890년 말 조선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 된 그는 파리의 박물관 촉탁으로 '춘향전'과 '심청전'을 프랑스에 소개했다. 그리고 2년 반 만에 파리에서 돌아오던 홍종우는 나름의 소신에 따라 상하이의 테러범이 되었다.
이런 배운 자들의 폭력을 보면서 나는 카진스키(1942∼ )를 떠올린다. 천재적 수학자로 미국 버클리대 교수였던 그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18년 동안 열여섯 번의 우편물 폭탄으로 3명을 죽이고 23명을 다치게 했다가 붙잡혀 지금 감옥에 있다. '유나바머'란 별명을 얻은 그를 흉내 낸 듯한 조승희를 보며 앞으로 세상은 더욱 더 크고,더 잔혹한 테러로 물들 것이 걱정이다. 소외된 배운 자는 '공공의 적'으로 둔갑하기도 쉬운 듯해서 하는 말이다.
113년 전 상하이에서 암살당한 김옥균(金玉均·1851∼1894)의 시체는 여러 부분으로 절단되었다. 그리고 머리에는'大逆不道玉均(대역부도옥균)'이라 쓴 깃발이 붙여져 한강 가에 전시되었고,다른 부분은 팔도의 시장을 끌려 다녔다. 그 기록을 역사 시간에 읽은 40년 전의 미국 학생들은 그 잔혹함에 찔끔했다. 그런 동료 대학원생들 옆에서 나도 처음으로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그런 일은 오래 전 조선왕국의 일이고,더구나 서양 사람들은 중세를 통해 얼마나 잔인한 짓거리를 많이 했더냐고 가볍게 항의했던 기억이다. 그 후 세상은 바뀌어 이제 임금과 왕비는 없고,사람을 죽여 그 시신을 다시 욕보이는 짓은 사라졌다. 인류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인간성에도 진보와 발전이 계속된다고 사람들은 말하기도 한다. 인간의 잔학성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사형제도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처럼,제도적 폭력이 줄어들고 있음은 분명해 보이기도 한다.
이런 세상에서도 끔찍하고 잔혹한 폭거는 그칠 줄을 모른다. 지난달 16일과 18일에 각각 32명의 목숨을 앗아간 미국과 중국의 사고들도 그런 경우다. 4월16일 미국 버지니아주의 어느 대학 교실에서는 학생 조승희가 총을 난사하여 32명을 죽이고,자신도 자살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4월18일 중국의 한 철강 공장에서는 10m 높이에 있던 뜨거운 쇳물 그릇이 떨어져 쇳물 30t이 공장 직원들을 덮쳤다. 하필 버지니아의 희생자와 똑같은 32명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교실의 32명과 공장의 32명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교실의 희생은 가해자가 분명한 폭거였지만,공장의 희생에는 가해자는 없다. 하지만 순식간에 시체조차 완전히 녹아 없어졌다는 공장의 희생이 더 참혹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김옥균이나 그 이전의 수많은 처형당한 사람들의 처지가 미국 교실의 희생자나 중국 공장의 사망자보다 더 잔혹했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의 잔혹성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줄어들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어떤 형태의 폭력이나 잔혹성은 사라져가고 있지만,모양이 다른 폭거는 여전히 인간사회에 감춰져 있음을 보게 된다. 영화를 비롯한 대중매체를 통한 폭력과 잔혹의 표현은 또 다른 모습의 숨겨진 인간이란 생각도 든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만족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는 없다. 1세기 전의 조선왕조와 서양 세계는 전혀 이질적이었고,그래서 김옥균의 시체 전시가 당시의 서양 사람들에게는 참혹하게 느껴졌다. 세계가 점점 지구촌으로 바뀌는 지금 나라와 민족의 경계는 점점 허물어져가고,그와 함께 법률과 도덕의 벽도 낮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인간사회 모두에게 같은 법률과 같은 도덕이 받아들여져 있지는 않다. 또 설령 그런 날이 온다 해도 법과 도덕이 인간의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지난 한 해 동안 전 세계의 테러 공격은 1만4338건으로 2005년에 비해 29%가 증가했다는 최근 보도가 있었다. 미국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테러 증가가 그 원인이지만,문명의 높이는 오히려 인간의 잔혹성을 높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기는 김옥균을 상하이로 유인해 살해한 사람은 김옥균보다 더 '문명개화'(文明開化)한 홍종우(洪鍾宇·1854∼1913)였다. 1888년 일본 조일(朝日:아사히)신문사에서 2년 이상 일하다가 1890년 말 조선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 된 그는 파리의 박물관 촉탁으로 '춘향전'과 '심청전'을 프랑스에 소개했다. 그리고 2년 반 만에 파리에서 돌아오던 홍종우는 나름의 소신에 따라 상하이의 테러범이 되었다.
이런 배운 자들의 폭력을 보면서 나는 카진스키(1942∼ )를 떠올린다. 천재적 수학자로 미국 버클리대 교수였던 그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18년 동안 열여섯 번의 우편물 폭탄으로 3명을 죽이고 23명을 다치게 했다가 붙잡혀 지금 감옥에 있다. '유나바머'란 별명을 얻은 그를 흉내 낸 듯한 조승희를 보며 앞으로 세상은 더욱 더 크고,더 잔혹한 테러로 물들 것이 걱정이다. 소외된 배운 자는 '공공의 적'으로 둔갑하기도 쉬운 듯해서 하는 말이다.